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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교진 Mar 27. 2023

질병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의사에게 듣는, 인생의 오후

미래 의학의 선구자가 전하는 행복 레시피

몸이 계속 불편하고 의욕이 없어 삶의 질이 떨어져 있는데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해도 원인을 못 찾는 경우가 있다. 많은 현대인이 가진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병원이 있다. 진단명을 찾지 못해 괴로운 그 원인을 밝혀내고 그에 따른 몸 처방, 마음 처방까지 내려준다. 서울 대치동에 있는 웰케어클리닉이 근본적인 병의 원인을 찾고 몸과 마음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병원이다. 대표원장 김경철 박사는 질병을 예측하고 예방하는 미래 의학의 선구자이며 유전체 학자다. 국내 굴지의 유전체 회사인 테라젠이텍스 바이오연구소 임원으로 활동해 왔고, 미래 의학에 관심이 있는 의사들을 교육하는 플랫폼도 만들었다. 화려하고 유능한 의사로 보이는 김 박사는, 사실 가난한 시골 교회 목회자 가정에서 숱한 가난과 결핍을 견디며 성장한 PK(목회자 자녀)다.        


    

평범한 의사, 한국 최초로 유전체 심포지엄을 개최하다

김경철 박사는 평범한 가정의학 전문의였다가 세계적인 유전체 의학 권위자에게 영양유전학을 배우고 유전체 사업에 뛰어들었다. 질병을 예측하여 예방하는 미래 의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면서 교육 사업도 시작했고, 축적된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예방의학 클리닉 병원을 개원했다. 미래 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계기가 궁금하다. 그의 인생을 이끄신 하나님은 어떤 과정을 연출해 오셨을까.
 

“저는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좋은 가장이자 좋은 의사가 되는 것이 좌우명이었어요. 두 아이를 키우며 서울 외곽에서 진료하며 만족해하는 평범한 의사였죠. 그러다 어느 날 잡지의 커버스토리를 읽다가 가슴이 뛰었어요.”

유전자에 따라 영양과 다이어트를 달리한다는 흥미로운 연구와 음식이 유전자를 바꾸어 암을 예방한다는 기사였다. 2003년 휴먼 게놈 지도가 완성되면서 전 세계가 흥분한 분야지만 또래 의사 대부분은 학부 때 유전체에 대해 간단한 지식만 접했을 뿐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평범한 봉직의였던 그는 2005년 1월 뉴스위크 한국판 커버스토리로 접한 영양과 유전에 흥미를 느껴, 무모한 시도를 했다.      

기사에 소개된 보스턴 터프츠(Tufts) 대학의 호세 오도바스(Jose Ordovas) 박사에게 메일을 보냈다. “한국에 와서 강의해 줄 수 있겠습니까?” 가능성 없어 보였지만, 덜컥 오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30대 초반의 그에게는 세계적 대가를 초청할 비용도, 사람을 모을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미즈메디병원 노성일 이사장과 연세대학교 노화 과학 이종호 교수가 발 벗고 나서 주다. 그 결과 국내 최초로 영양유전체(Nutrigenomics) 심포지엄을 열 수 있었다. 2005년 8월이었다.     


     

유전체 학자가 되어 딴짓하는 의사로 알려지다

마침 그의 아내(연세대 간호학과 김상희 교수)가 보스턴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그도 미국에서 유전체 의학을 배울 기회를 붙잡아 극적으로 오도바스 박사의 연구소에 들어갔다. 평범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를 유전체의학 박사가 되도록 하나님이 길을 여신 것이다. 돈도 없고 영어도 부족한 데다 관련 기초 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현지인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유전체 세계에 빠져들었다. 박사과정으로 연구한 골다공증 유전체 논문을 훌륭하게 완성했고 새로운 실험과 데이터 분석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귀국한 후 보스턴에서 만난 후성유전학 연구실의 최상운 박사가 차의과학대학에서 스카우트를 제안해 차의과학대학병원인 차움의원으로 옮겨 진료했다. 청담동과 판교의 연구소를 오가며 진료와 연구를 하는 특별한 경험이 이어졌다. 차움의원에서는 꽤 비싼 유전체 검사들을 어려움 없이 처방할 수 있었고, 직접 상담하면서 유전체에 대해 임상 적용의 경험을 넓혀갔다. 테라젠이텍스라는 유전체 회사의 부사장으로 임용돼 산업계에 들어가 연구를 겸하면서 ‘딴짓하는 의사’로 알려졌다. 2005년 뉴스위크지를 읽고 꿈꾸던 연구와 관심은 이렇게 차근차근 현실이 되었다.           



예방의학 클리닉, 질병을 예측하고 예방하다

김 박사는 환자와의 접점을 유지하며 쌓은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증진하는 데 힘썼다. 다른 의사들에게 미래 의학, 항노화 유전체 의학을 교육하는 활동도 겸하며 하루의 시간을 바쁘게 사용한다.

“딴짓이라기보다 조금 앞서 미래 의학을 경험한 지식을 전파하고 있어요. 개업하겠다는 결심이 있었거나, 의대 교수의 꿈을 품고 살아온 것이 아니었어요. 계속 진료를 하다 보니 하나님이 다음 스텝을 준비해 주셨고, 현재의 모습이 되었죠.”

웰케어클리닉은 잘 먹고 잘 자는 것을 모토로 한다. 우리는 늙지 않을 수는 없으나 건강하게 늙기 위해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건강과 행복의 핵심이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이 두 가지가 쉽지 않다. 김 박사의 병원을 찾는 환자는 대부분 식습관과 수면 문제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큰 병원에서조차 자기 증상을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해요. 질병으로 판명되지 않았지만 건강하지는 않은 상태죠. 대학병원의 진단 기준은 질병이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데도 진단명이 없으면 환자는 계속 고통 속에 놓이게 됩니다.”

김 박사는 스트레스, 영양상태, 장내미생물 상태 등의 지표로 환자의 몸을 분석해 원인을 밝혀주면 환자가 크게 기뻐한다고 한다. 드디어 원인을 찾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증상을 인정받은 환자에게 맞춤 치료를 하고 단기간에 좋은 결과를 얻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 그의 얼굴은 목회자에게 볼 수 있는 포근함이 깃들어 있다.


 

방파선교회를 이끈 아버지, 미용기술로 가족을 부양한 어머니

“아버님이 목사셨어요. 1939년생 김영곤 목사님입니다. 호남신학대 출신으로 방파선교회를 만들어 40년 이상 총무로 섬기고 계시죠. 지금도 정정하셔서 84세인 올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네팔을 여행 중이십니다.”

가족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평생 가난한 개척교회 목회를 하셨기 때문이다. 방파선교회는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 선교를 이르는 명칭으로 1980년 친구 정선균 선교사가 방글라데시에서 사역하다 소천한 것을 본 김영곤 목사가 제3세계에 파송 선교사 후원 목적으로 만든 선교회다. 70여 선교사 가정을 파송했지만, 사무실도 간사도 없었다.     

“초등학생인 우리 4남매의 편지를 받은 분들이 십시일반 후원금을 보내주셔서 선교회를 운영했어요. 저는 핍절한 살림살이의 집을 선교회 사무실로 꾸린 부모님 모습을 보고 자랐죠. 아버님은 제가 선교사가 되길 원하셨는데 무척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했어요. 그러다 중2 때 교회 기도원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면서 사람들을 돕는 데 인생의 소명을 받았죠. 그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며 의사의 꿈을 키웠어요.”

아버지의 헌신은 한계 이상의 벅찬 순종이었는데 그 인생을 곁에서 보며 자란 그는 아버지로부터 큰 신앙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삶이 잊지 못할 설교였고 가정교육 자체였다고.


그의 어머니는 호남지역 시골에서 목회하신 아버지를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가난한 시골 마을의 열악한 환경에서 4남매를 키우셨다. “잊지 못할 일화가 있는데 제가 태어난 겨울날의 바로 다음 주가 부흥회였어요. 어머니는 저를 출산 후 산후조리도 못 하시고 바로 전 교인의 밥을 지어야 했죠.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어머니는 미용기술로 자녀들을 양육하셨는데 마지막 산달까지 일하셨다. 미용 장비를 들고 시골 논두렁길을 걷던 중에 여동생을 출산했다. 지나가는 아낙네에게 부탁해서 소지한 미용가위로 탯줄을 잘라 여동생을 낳았다. 그 여동생은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목사 사모로 건강하게 살고 있다.     



책에서 인생의 목표를, 아버지에게서 신앙의 유산을

“청소년 시절 저는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베스트셀러인 《천국의 열쇠》의 저자 A. J. 크로닌이 쓴 《성채》라는 책의 주인공이 의사입니다. 18세기 영국 의사가 행한 공공의료의 삶에 큰 감명을 받았죠.”

그는 섬기며 사는 직업으로 의사를 열망했다. 연세대 의대에 입학해 공부하며 쉽게 주눅 들던 자신을 극복하게 된 계기가 CMF(한국누가회선교부)를 통해서다. 크리스천 의료인 모임에서 자존감을 회복했고 리더십을 배우면서 아버지가 원한 목회적 소양도 함양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 감사로 누가회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서울경기 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 가난한 목회자 가정에서 의대에 진학 후 많은 학비를 어떻게 충당했을까?     

“저는 근로 장학금으로 학비를 벌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자치위원으로 활동했고 과외도 겸하면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했죠. 당시 기숙사 운영이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학생들이 받는 서비스를 계산하고, 식당과 청소 일을 하시는 여사님들의 연봉협상에도 참여해 그분들 처우를 개선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그 경험은 훗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유익했죠. 의대 공부를 하면서 별의별 경험을 다 해본 것 같아요.”
소심한 의대생인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어 학업을 하면서 남을 설득하고 의견을 제시하며 소통하는 능력을 훈련할 수 있었다.     





목회자 자녀로서 감사한 기억들

“눈뜨면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주말에는 교회 청소를 했어요. 지금 제가 새벽형 인간으로 사는 건 모두 아버지 덕분이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전국에 선교 후원 편지를 썼어요. 가족 휴가를 보낸 적 없고 교회 수련회로 바쁘게 사는 것이 일상이었죠.”

그의 가족은 틈만 나면 성도들과 선교사들을 위한 일에 헌신했다. 그는 여유 있는 친구들과 비교하지도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그런 일상이 몸에 배어 있었다.

“섬긴다는 표현보다 더 깊숙이 필요한 일꾼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죠. 신앙 공동체를 섬길 때 당시의 기억이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더 섬기고 애쓰는 데 스스럼이 없게 됐어요.”
 

가난의 결핍에 트라우마가 없는 김 박사의 인생에는 오히려 행복한 변곡점들이 있다.
“첫 번째는 코이카를 통해 의료 공백 험지인 파푸아뉴기니 파견을 자청해 군의관 생활을 한 것입니다. 군 생활을 해외 봉사활동으로 하고는 결심이 있었어요. 다만, 3살 된 딸을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 고민이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어린 딸을 키우며 둘째 아들까지 얻었어요.”

김 박사는 외교관도 꺼린다는 그곳에서 3년을 보냈다.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소명에 부합한 삶을 살았다고 회고한다. 많은 선교사를 만나 교제했고 그분들의 깊은 고충을 접할 수 있었다. 의사로서 도움을 제공하며 집을 선교사 게스트하우스로 오픈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 그곳에 다시 갈 계획을 품고 있다.
 
“두 번째, 보스턴에서의 유학 시절입니다. 지금도 광야의 삶으로 기억한다. 월급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들을 교육해야 했고 심플라이프를 경험했어요.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교회 지인이었고, 매우 단순한 가족 중심의 생활에서 연구에만 매진했죠.”

한국에서 봉직의로 지낸 10년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타국에서 가난을 견디며 영적으로 마음을 다독이며 견뎌야 했지만, 김 박사는 그때가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교회가 삶의 중심이었고, 가족이 중요한 축이었다. 교회와 가족을 중심으로 한 단순한 생활에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자 환자, 가난한 환자 모두를 진료하며 알게 된 행복의 진리

3년의 파푸아뉴기니 파견, 10년 이상의 화곡동에서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했고, 청담동과 대치동에서 10년 차 의사로 일했다. 중간에 보스턴에서 세계 유수의 대학 유학생들과 이웃하며 지내기도 했다.

“어느 위치에서든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어요. 기본 생활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곳이든, 부동산 가치가 높은 도시든, 사교육 핵심 도시든,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로 고통을 견디고 불행하게 사는 모습을 접했죠.”     

김 박사는 행복은 돈과 교육과 상관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오히려 돈이 많은 사람이 수면장애와 스트레스로 더 자주 병원을 찾는다. 강남 대치동에서 높은 명성,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진료하며 그분들의 삶이 안 됐다는 생각을 들 때가 많다. 가난한 사람과 결이 달라도 부자들 또한 삶이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동일하게 질병을 고치는 역할로 돕겠다는 생각에만 집중하게 되었어요. 제게 오는 분들은 모두가 여러 입장에서 공통적으로 아픈 사람들이죠. 돈이 많다고 건강을 잘 유지하는 건 아닙니다. 성공만을 목표로 살다가 관계가 깨지고 몸이 상하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좋은 대학을 나오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기본 욕구일 것이다. 좀 더 편안한 노후를 추구하려는 소망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많이 가지려는 과정에서 자신만이 소유하려는 것, 경쟁우위에 있으려고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 크리스천이 민감하지 못하면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     

“제가 하는 검사 중에 장내미생물을 보는 마이크로바이옴 검사가 있어요. 이 부유한 지역의 10대들이 그렇지 않은 지역의 10대들보다 훨씬 안 좋아요. 학창 시절의 좋은 추억을 쌓아야 할 10대들이 불행을 견디고 살아가고 있어요.”

3,500여 명의 학원 선생과 수만 명의 학생이 스트레스에 갇혀 지내며 명문대 진학을 위해 반강제적 학업을 하고 있다. 김 박사는 전 세계에서 스트레스가 가장 많은 도시가 대치동일 것이라고 한다. 상향적 위치인 고지에 올라가려는 목표를 갖고 그 목표만큼 좌절감을 견디며 사는 사람들. 목표에 달성하고 나서도 그 과정에서 순탄하지 않던 가정의 상처로 괴로워한다. 아이 부모들을 진료하고 상담하면서 수험생의 스트레스보다 더 많은 인생의 스트레스로 부대끼는 것을 보게 된다.     

“이분들 가정을 행복하게 바꿀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사명이라 생각해요. 아이들이 단순히 억지로 공부하지 말고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고 즐겁게 이 시기를 공부하도록 돕고, 부모는 아이를 닦달하며 관계가 깨진 상태로 노심초사하기보다 스스로 공부하기까지 기다려주도록 조언합니다.”      

김 박사는 가정의 행복은 우선순위 문제라고 한다. 본인이 우선이고 그다음 배우자, 아이들 순으로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 우선순위의 역순으로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건강한 자신이 있어야 건강한 부모가 있고 건강한 자녀가 있다. 자녀교육에 앞서 부부관계의 행복이 건강의 척도다. 그래서 본인의 건강과 부부관계 회복을 먼저 추구하라는 말씀을 환자들에게 꼭 드린다고!
  
 

중년을 맞은 이들의 건강한 노후란

“제게 오시는 환자 중에 45세 이상의 중년층이 많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특유의 열심으로 살아온 분들이죠. 인생 후반부를 맞으면서 직장에서는 은퇴해야 하고 앞으로 40~50년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 당황해합니다.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다가 어느 정도 성공과 성취를 이뤘어도 행복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것이죠.”      

행복에 대한 준비 없이 인생 후반부를 갖게 된 많은 사람이 하는 실수가 있다. 생의 전반기처럼 정상에 남들보다 빨리 도달하기 위해 산을 오를 때의 속도에만 익숙해 있다. 하산은 등산과는 전혀 다른 목표와 속도가 필요한데도 남들과 같은 지점을 찾으려 하고 자기에게 맞는 속도의 느림과 누림의 삶에는 낯설어한다.      

“산을 내려갈 때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에요. 모두가 방향도 다르고, 빠른 속도는 사고를 불러일으키니까요. 그동안 보지 못한 산세를 느끼면서 여기저기 나무의 모습도 감상하고 새들 소리도 듣고 풀잎도 보고 즐기면서 내려오는 가이드 조언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인생 속도를 늦추고 행복을 향해서 내려가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 박사는 진료실에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70~80대 어르신 부부가 손잡고 들어오는 모습을 꼽는다. “평생을 그렇게 서로 존중하고 위안을 전하는 모습은 흔치 않거든요. 그런 모습이 저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절정인 거 같아요.”

크리스천 의사로서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환자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행복과 회복을 전하고, 사회 전체가 건강한 행복으로 선순환되길 소망한다.


_글 황교진 신앙계 / 2023년 2월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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