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터닝포인트가 된 일화들
어머니 뇌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첫 면회 시간은 눈물 바다였다. 이 갑작스럽고 끔찍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멀리 마산과 울산에서 어머니 친척들이 모두 올라오셨고, 중환자실의 20분 면회에서 다들 통곡하며 의식이 없는 어머니와 마주했다. 어머니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목에는 기관 절개한 호스를 끼고 가래를 뽑아내야 호흡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폴리라인이라는 소변 줄도 착용했다. 주변에는 교통사고 환자가 입원해 정신이 없는 분위기였다.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심한 지옥이라면 그 시간이었다. 중환자실 복도를 떠날 수 없었다. 다음 면회 시간까지 그저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하는 심정, 누군가 내게 다가와 손이라도 꼭 잡아주었으면 하는 외로움이 차올랐다. 밤에 남은 건 나 혼자였다. 자정 가까이 되어 집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외가의 친척들이 모두 안 자고 계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분위기가 몹시 차가웠다. 아버지는 안 보였다. 늘 과묵하시던 큰외삼촌이 가족들을 달래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어머님이 곧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딘가 공격해야 할 대상이라도 있어야 한 듯이 소리 지르며 싸운 흔적을 감지했다. 이 순간 함께 위로하고 잘 될 거라고 격려해야 할 혈육들이 희생양을 찾고 싸우다니! 가장 괴로운 건 우리 가족인데, 날선 공격은 우리 가족을 향해 있었다. 이런 일에 가장 먼저 찾아오는 건 분열이다. 위로와 격려보다 자기감정이 우선인 것을 나는 아프게 여러 번 경험했다. 차라리 다른 아픔은 느끼지도 말자며 나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그분들은 그렇게 자기 할 말 해놓고 각자의 자리로 떠났다. 나는 어머니 곁을 지키면서 결국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혼자서 책임져야 할 아픔임을 처음부터 느꼈다.
내게 공동체는 가족과 친척이 아니라 교회였다. 점심시간이면 부목사님 세 분이 교대로 오셔서 면회시간에 들어가 어머니 손을 잡고 기도해주셨다. 면회 후 같이 점심을 먹으며 내 괴로운 심정을 들어주셨다. 겨울수련회 기간이라 기존의 다른 친구들은 볼 수 없었다. 친구들은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는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연락할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그저 손잡아 주고 몇 마디 들어주는 것이면 충분했다. 의사도 예후를 진단할 수 없는, 뇌출혈로 의식이 없는 어머니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아픔을 위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평소처럼 다가와 차 한 잔 같이 마셔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내 친구 관계는 대학 시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학교 친구들에서 이번 일을 통해 새로 만나는 교회 친구로 바뀌었다. 자주 찾아와 주었고, 기도해 주었고, 내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기도부탁 글을 올리면 뜨겁게 호응해 주었다.
11월 27일 갑자기 의식을 잃으신 어머님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일으켜 주실 줄 알았던 기대는 무너졌다. 생애 가장 가슴 아픈 성탄절을 보냈다. 새해가 되어도 어머니는 천천히 한쪽 눈을 조금씩 뜨신 것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나는 하루 세 번 면회하면서 대학원 입학 전 세미나에 참석했다. 어딘가 몰두할 거리가 필요했다. 공부라도 해야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공부하는 건축구조 연구실에서는 실험하고 남은 고철들을 처분한 대금으로 어머니 병원비에 보태라고 돈도 쥐어주셨다. 그런 감사한 마음들을 확인하면서도 내 마음은 절망과 탄식이 가득했다. 한 번은 단합회로 북한산 등반 일정이 짜여졌다. 당시 모 대학 산악부의 겨울철 지리산 등반에서 조난 사고가 일어나 많은 청춘들이 사망한 뉴스가 있었다. 나는 차라리 이 땅을 떠난 그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삶에 의욕도 희망도 없었다. 면회 시간마다 마주하는 어머니는 예전의 단아한 모습은 오간데 없고 점점 노숙자처럼 변해갔다. 아침 면회를 동생 혼자 들어가게 하고 난 대학원 동기와 선배들과 북한산에 오르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행을 이탈해 앞서 올라갔다. 북한산 상층부의 미끄러운 바위에서 그만 미끄러졌다. 다행히 옆의 줄을 잡고 엉덩방아를 찧는 정도로 그쳤다. 그런데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소리가 “죽을 뻔했네”였다. 쓴웃음이 나왔다. 정상에서 찬바람을 쐬며 기다리니 잠시 후 아래에서 올라오는 선배들이 보였다. 중간에 내가 보이지 않아 걱정했다며 야단을 맞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에 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 질문을 하면 할수록 우울했고 답도 없었다. 답이 있었다면 마음이 시원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 불기둥이란 답을 눈앞에서 보면서 계속 죄를 짓는다. 답이 있어도 마음의 변화는 없다. 내 고통은 답의 유무에 있지 않았다.
혜민병원에서 해를 넘기고 설 명절을 맞으면서 뉴스에서는 IMF로 인한 고통이 날마다 도배되어 흘러나왔다. 중환자실 철문 앞에서 뇌 기능이 정지된 어머니를 그저 바라보며 극심한 고통 중에 있던 나는 그 국가적 아픔에 공감하면서 모두가 아픈 시기인 것이 차라리 위로가 될 정도였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1월 말에 차도가 없는 어머니를 경희의료원으로 옮겼다. 구급차 안에서 한없이 울고 또 울었다. 병원을 옮기는 건 미래에 대한 고통, 현실에 대한 절망을 가중시킨다. 흔들리는 앰뷸런스에서 내 온 몸도 죽어가는 듯했다. 경희의료원에서 양한방 치료를 병행했지만 치료 효과는 없었다. 6월에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2주간 비싼 비용이 드는 여러 정밀 검사를 해보았지만, 의료진에게 가망이 없는 상태라는 절망적인 진단을 받았다. 집으로 모시고 가야 하는 결정 앞에서 나는 집과 가까운 아산병원 신경외과 선생님을 만나 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선생님은 차가운 얼굴로 내 질문에 간단하게 답하시며 어머니 입원이 안 된다고 하셨다. 사정해도 소용이 없는 냉정한 공기에 나는 인사하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대기업의 자녀였다면, 엄마가 현대그룹의 사모님이었다면 이 병원의 특실로 어머니를 vip로 모실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르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아산병원에서의 그 짧은 시간은 내 고통의 터닝 포인트였다.
그 숨 막히는 고통 중에 내가 깨달은 것이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하지 말자’였다.
나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서 내가 의사와 간호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어떻게 하면’ 대기업 사모님보다 더 어머니를 vip로 모실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내가 의대 출신이 아니지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모든 생각을 어머니 간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마치 엄마가 갓 태어난 아픈 딸을 돌보는 심정으로 나는 이 아픔과 싸워갔다. 아니 싸우기보다 내 일상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이 적절하다. 나는 식물상태의 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정확하게 간호하는 아들로 성장했다. ‘왜’라는 질문을 버리고 ‘어떻게’를 선택한 뒤 이런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신비한 형통을 경험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