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다감 에피소드 1
3수생 아들을 사랑한 어머니
고등학교 때 나는 등록금을 기한에 맞춰 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다행히 돈 문제 때문에 따로 불러 엄하게 꾸짖는 담임선생님은 없었다. 종례 시간에 등록금 미납자는 얼른 내라는 말씀에 눈치 보는 정도였지만, 항상 그 명단에 내가 들어 있는 것에 위축감이 들었다. 등록금보다 주기가 짧았던 보충수업비 내는 날은 곤욕이었다. 정석도 다 풀려면 한참 달려야 하는데 보충수업 교재인 천재수학 책을 또 사야 한다는 사실이 동의가 되지 않아 교재 없이 막무가내로 수업에 참석했다. 시험 앞두고 겨우 돈을 모아 교재를 사는, 비효율적인 학교 생활을 했다. 내신성적은 좋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모의고사 성적은 엉망이었다. 범위가 정해져 있는 과목에서 점수를 얻는 것은 그런대로 목표치를 이뤄냈지만, 범위가 딱히 없는 모의고사에서는 고전했다. 나는 늘 긴장감과 책임감에 눌려 가난과 억압적인 공부에서 떠나고 싶었다. 습작 노트를 만들어 감성을 키우는 글쓰기에 집중한 것이 그나마 버텨낸 힘이 되었다. 그 힘이 결국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자양분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게 미안해하셨다. 수험생 뒷바라지 못하는 당신의 자책감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보란 듯이 명문대에 들어가서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잔인한 선지원 후시험 제도 하에 전기와 후기 분할 합쳐서 다섯 번이나 떨어졌다. 3수한 뒤 전기대에 떨어졌을 때 어머니가 합격 발표장인 K대 운동장까지 동행하셨다. 나는 전날 ARS로 떨어진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말씀드리지 않고, 추가 합격 명단에 기대를 걸고 가보았다. 2지망 추가합격자 명단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3수 할 때 학원비 달라고 하지 못했다. 혼자서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여기고 강남시립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한눈팔지 않고 공부했는데 결국 국어 주관식 답안지에 이름을 쓰지 않은 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아슬아슬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 고독한 3수 시절에 성경 1독을 했다. 가장 절박하고 낮은 자존감의 시기는 나를 기도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날 K대 부근의 썰렁한 카페에서 우시며 "엄마가 못해 준 게 넘 많아서 네가 고생만 하는구나" 하며 자책하셨다. 나는 막상 극도의 절망에 반복해서 부딪치니 의외로 덤덤했다.
"괜찮아요. 이게 다 제 인생의 약이에요. 후기 분할 모집 대학 몇 군데 중에 잘 선택해서 들어갈게요. 그 길이 내게 더 맞는 길이니까 지금 잠시 돌아가는 거겠죠. 엄마만 힘내시면 돼요."
어머니는 내가 별로 괴로워하지 않으니 눈물을 닦고 웃으셨다. 그리고 당시로선 큰돈인 20만 원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또 떨어졌다고 기죽지 말고 겨울 옷이라도 따뜻한 거 새로 하나 사 입어. 엄마가 같이 백화점에 가고 싶은데 가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니 먼저 집에 갈게."
"엄마는 참! 대학도 3수씩이나 해서 떨어진 아들, 뭐 잘했다고..."
난 다섯 번째 입시 실패 날, 코오롱의 비싼 패딩을 사 입었다.
후기 시험 준비하던 그 겨울에 걸프전이 터졌다. 이번에 실패하면 군대에 가야 하는 위기 상황에서 나는 걸프전에 파병 가서 사막에서 근무하는 앞날이 그려졌다.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패딩을 보며, 꼭 저걸 입고 캠퍼스를 누비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쉬지 않고 공부를 했다. 어머니는 안전한 점수대의 지방대에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인 서울의 후기 분할로 뽑는 S대의 이과 전공 중 가장 인문적인 건축공학과에 마지막 기회를 걸었다. 그리고 합격했다. 길고 고단한 문을 넘어 처음으로 이제 조금은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조용하던 가슴이 뛰었다.
고3 겨울부터 세 번의 성탄절마다 얼마나 우울했던가. 진작에 대학생 아들이 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하며 가게 문도 일찍 닫고 귀가해 축하 파티를 열어주셨다. 서둘러 슈퍼에서 장을 보시다가 손가락이 유리 문에 끼어 살이 삐져나오는 부상에도 아픔을 웃음으로 참고 근사한 파티를 준비해 주셨다.
늘 엄마 역할 제대로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내겐 가장 열심히 사시며 인내와 희생을 알려주신 분이다. 어머니의 삶은 내게 사랑의 교과서이고 은혜로운 설교였다. 나는 그 삶의 메시지를 접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정해갔다. 못났다고 말씀하지 않고 다 자기 탓이라고 하신 그 눈빛, 내가 실수해도 포근하게 안길 품으로 계신 어머니라는 세계는 거칠고 고단한 일상을 부드럽게 바꾸는 영원한 친정이었다.
신병훈련소 퇴소식 사진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다. 광장시장에서 어머니 가게 옆에서 일하신 아주머니는 훈련소 퇴소식에서 찍은 이 사진 보시고는 우셨다고 한다. 엄마의 이 세련된 머리칼은 삭발이 된 채 병상에 누워 계셨다. 집에서 내가 간호할 때는 내 손으로 잘 다듬어 헤어스타일을 유지시켜 드렸는데 2004년 재활요양병원에 모신 뒤로는 병원 측에서 머리를 짧게 밀었다. 병원에서 자주 머리를 감겨 드리지 못하니 두피에 피부병 생기는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나는 어머님이 가장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는 간호 노하우를 알아도 곁에서 매일 돌보지 못하는 고통에 직장 생활이 답답하기만 했다.
몰라서 답답한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알고 있는 것을 활용하지 못하고 참아야 하는 답답함이 더 고통스럽다. 신앙의 힘으로 의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다. 믿음은 곧 의존이다. 내가 무기력할 때는 의존만이 유일한 답이지만, 내가 '최고인 알고 있는 바'를 내려놓고 의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최고인 알고 있는 바'가 자부심이다.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다. 객관적이고 넓은 눈, 자기 부족, 다양성,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허함을 상실한다.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겸허함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팬덤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 주변에 최고라고 하는 찬사만 쏟아지는 공간에 놓여 있는 사람, 그런 팬덤과 찬사를 일부러 만들어 놓고 자위하는 사람 등 모두 자부심이라는 어둠에 둘러 싸여 가짜 믿음을 지니고 있다.
내가 욕창과 폐렴 없이 깨끗하고 안정적인 상태로 어머니를 간호해 온 자부심을 버리지 않고 간호사와 간병인과 마찰을 일으켰다면 나는 병원에서 블랙컨슈머 보호자로 찍혔을 것이다. 어머니 간호해 드리러 병원에 도착할 때마다 다짐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낮아져야 한다고... 어머니 병상에서 무수한 당혹스러움과 디테일 결여의 케어를 봐도 간호사님과 간병인께 "수고 많으셨죠? 어머니 보살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인사만 드린다. 내 눈높이를 낮추지 않고 주장하면 대한민국에 어머니를 모실 병원은 한 군데도 없다. 다행히 욕창과 폐렴 없이 장기간 케어한 내 눈높이는 현실적으로 조정되어 갔고, 어머니 케어도 이 이상 해줄 수 있는 병원은 없다고 인정한 병원에서 마지막 9년을 보냈다.
집에서 8년간 24시간을 함께 있다가 재활요양병원에 모시고 병원에서 할 수 없는 케어를 보충해 가며 지낼 때 나는 하나뿐인 아들 군대에 보내 놓은 엄마 심정이 자주 떠올랐다. 어떠셨을까?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마산 부림시장 대형 화제로 가게가 소실돼 경상남도 남지의 외할머니 집에 맡겨 두고 상경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서울 현저동의 달동네 집으로 올라와 부모님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서대문 영천시장에서 장사하시는 어머니 얼굴을 제대로 볼 날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수업료와 보충수업비, 참고서 값 제대로 주지 못하여 몰래 많이 우셨다. 재수, 삼수할 때 수험생 뒷바라지 못해 자꾸 대학에 떨어지게 했다고 미안하다며 펑펑 우신 모습은 지금도 아프게 남아 있다.
그런 아들 군대 보내 놓고 퇴소식에서 만날 때 얼마나 가슴이 저미셨을까. 시간이 지나니 내 마음이 꼭 그랬다.
집에서 매일 씻기고 영양죽을 만들어 호스에 넣어 드렸던 어머니, 짧은 머리에 시간이 지나면서 앙상해지시는 팔다리 보면서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느껴갔다.
어렸을 때 1년에 한 번 명절에 나를 보러 내려오시면 외할머니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말 안 듣던 일들부터 엄마에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1년 만에 만나는 아들에게 매부터 드셨다. 돌아보니 그건 할머니 말 안 들어 때린 매가 아니라, 옆에서 돌봐 주지 못한 현실에 대한 자책과 속상함이었다. 나는 왜 맞는지 모르고 호된 매를 맞으며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라면서 우울질 기질이 형성되었다. 별로 말이 없고,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말로 직접 대화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걸 더 좋아했다. 전화받는 걸 두려워한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내 얘기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가장 싫어한 분야인 강연으로 살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사춘기 때 빚쟁이들이 집에 전화 걸어 부모 바꾸라고 할 때, 계서도 안 계신다고 말해 놓고 그 어른들에게 욕을 자주 먹었다. 그때는 내가 가난한 우리 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화로 욕먹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싶었고, 선지원 후시험 제도의 가혹함에 밀려 입대 영장 나오기 직전에 뒤늦게 입학한 뒤 감사하게도 선교단체 동아리(ivf) 겨울 수련회에서 내 자아의 깨어진 모습에 직면했다. 5년이나 신앙생활해 오며 만나지 못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2학년에 올라가 소그룹 성경공부와 교제를 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있어 영장을 연기할 수 없었다.
1992년 2월 18일, 겨울방학 중에 씩씩하게 군 선교를 하겠다며 입대했다. 의정부의 306보충대에서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나는 별 거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짧게 자른 머리를 들이대며 상처 땜통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키워주셔서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활짝 웃으면서 입대했다.
아마 돌아가시던 차 안에서 많이 우셨을 것이다. 며칠 후 입대할 때 입은 옷과 신발을 꼭꼭 싸서 보낸 소포를 받으실 때 아주 많이 우셨다고 했다. 소포 쌀 때 교관이 절대로 편지나 쪽지 같은 거 써넣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나는 종이를 찢어 잘 있다고 걱정 마시라고 짧게 적어 넣었다.
3박 4일 대기했던 보충대에서 불침번에게 일찍 깨워달라고 하여 몇몇 크리스천 입대자들과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갔다. 30사단에서 신병훈련을 받을 때는 교육 후 10분 휴식시간마다 포켓성경을 꺼내 읽어서 목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문산의 1군단 포병에 자대 배치받고 병장을 달면서는 입대 전의 선교사 마인드를 잘 지켜내진 못하여 제대하고 많이 반성했다. 훈련소에서 발에 큰 물집이 생겨 크게 고생했다. 평발인데 현역으로 입대한 탓에 행군 후 발이 다 상하고 말았다. 다행히 퇴소식 때는 상처가 아물어 아무렇지 않게 어머니와 기쁘게 해후할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 6주간의 신병훈련을 받는 동안 어머니께 다음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아들,
엄마는 아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들 받는 과외 한번 받지 않고
끼니와 건강 문제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며
길고 어려운 기간 헤쳐와 대학에 들어갔던 일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어.
아들은 지금까지 잘해 왔듯이 앞으로도 잘해 낼 거라 믿는다.
군 복무 기간 내내 엄마의 첫 편지가 버팀목이 되었다.
천국에서 우리 모자는 저렇게 포옹할 것이다.
아무 말도 못할 것이다. 눈물만 흐를 것이다.
이 땅에서 수고한 삶을 뜨거운 포옹 하나로 다 보상받을 것이다.
사랑한다.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