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다감 에피소드 2
꽃과 어머니
고등학교 진학 후 셋방살이를 다시 시작했다. 서울 생활은 서대문구 현저동의 달동네에서 하다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암사동의 방 두 칸짜리 2층 집으로 이사 오면서 살림이 나아졌지만 어머니의 고생은 그치지 않았다. 그 집을 팔고 다시 세를 얻어 생활한 곳에서 빚쟁이들이 종종 찾아오곤 했다. 주변에 불량배들을 만나 등하굣길에 회수권이나 시계를 뺏긴 적도 있었다. 고 3 올라가면서 고덕동의 18평짜리 시영아파트로 이사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시고 살기엔 좁은 셋집이었고 엘리베이터 없는 저 층형이었지만 주변 환경이 좋았고 생애 첫 아파트 생활이기도 했다. 연탄불로 난방을 했고, 부엌 벽 아래쪽에 쓰레기를 낙하해서 버리는 작은 문이 있었다. 겨울에는 물을 끓여서 머리를 감았고, 목욕은 상가 2층에서 주로 했다. 고 3 때 마음이 힘들 때마다 아파트 바로 옆의 개발제한구역으로 표기된 시골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지금은 고덕동, 상암동 일대가 고급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공기 좋은 시골이었다. 나는 입시를 앞두고도 그 시골의 자연 속을 걸으면서 우울함, 그리움, 고독함을 달래며 홀로 걷는 산책을 즐겼다. 내게 꽃과 나무, 논두렁길 등에서 평화를 느끼는 감성이 짙은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집에 오면 안개꽃에 쌓인 노란 프리지어가 담긴 향기로운 꽃병을 볼 수 있는 날이 있었다. 같이 사신 할머니는 엄마가 아무 쓸데없는 곳에 돈 쓴다고 핀잔을 주곤 하셨다. 중간 상인들을 상대로 하는 살벌한 동대문 새벽시장 일로 피곤한 하루하루를 견디던 엄마는 집안 한 구석을 꽃으로 장식하면서 자존감을 지키신 것 같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을 생존 때문에 버티면서 일상의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아마 엄마의 삶의 이유는 나와 동생의 성장이었을 것이다. 형편이 좋았다면 꽃병에 싱싱한 꽃이 자주 꽂혀 있었을 텐데, 고작 1년에 한두 번 정도 어머니가 사 오신 꽃을 볼 수 있었다. 그런 날은 나도 기분이 좋았다. 입시에 대한 중압감, 어머니의 고단함을 그칠 수 있게 살림을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감 등으로 마음 무거운 고교생이던 나는 엄마의 꽃을 보면 중산층이라도 된 듯한 여유가 생기고 밝아졌다. 안개꽃에 쌓인 프리지어로 긴장이 풀어지면서 우리 집에도 꽃 향기의 여유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집에 꽃이 있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잠들 시간 없이 힘든 바깥일과 가사 일을 병행하는 어머니 정서에 마르지 않는 소녀소녀한 아기자기함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코를 킁킁대면서 프리지어 향기를 맡고는 데생을 그리는 화가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꽃병에 시선을 한참 두었다.
그때 용돈을 아껴서라도 예쁜 프리지어 한 다발 사들고 어머니 품에 안겨드릴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엄마도 할머니처럼 내게 돈을 아무 쓸데없는 곳에 쓴다고 핀잔을 주셨을까?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잘 해드려야지 생각하면서도 지금 조그마한 이벤트로 기쁘게 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꽃이 가까이 있으면 해로운 중환자가 된 어머니 곁에서 화사한 안개꽃 프리지어를 한 다발 안겨 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다만 어머니 몸에 환자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도록 씻겨 드리며 은은한 향기가 나도록 유지해 드리는 나의 돌봄이 꽃 한 다발 전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대신했다. 어머니처럼 집안 한구석을 꽃으로 장식해 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싶은 꿈도 이루었다. 가끔 꽃을 사들고 귀가하는 가장이 되고 싶다. 그때 어머니께 못 해드렸던 아쉬움도 달래며 집에 꽃향기의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포근하고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안개꽃에 쌓인 프리지어는 사랑이다.
엄마의 웃음
집에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가끔 주말에 모자가 마주하는 시간엔 TV 앞에서 서로 별 얘기 없이 바보상자를 감상하곤 했다. 엄마가 광장시장 일에 잠시 해방되는 날이 출근하지 않는 주일을 앞둔 주말 오후였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난 엄마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옆으로 눕고 싶은지, 귀가 가려우신지, 대소변에 문제가 있는지, 디펜드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지 등을 나는 엄마의 표정으로 파악한다. 젖먹이 아기의 옹알이를 알아듣는 엄마처럼 나는 식물환자인 엄마와 어느 순간부터 소통하게 되었다. 가끔 떠오른다. 어머니와 말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TV 앞에서 멍하니 있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는 고단한 워킹맘이고 자신을 위한 시간은 낼 수 없어서 아들과 있는 시간에 말수가 적었을 거라 생각한다. TV를 함께 보며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도 늘어진 자세로 한 공간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편안하고 좋았다.
어머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는 것을 좋아하셨다. 개그맨 신동엽이나 영화배우 박중훈처럼 입담이 좋고 유쾌한 캐릭터에 집중하셨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동엽의 “안녕하시렵니까?” 에 난 별로 안 웃기는데 엄마는 조금도 식상해하지 않고 항상 고개를 상하로 흔들며 크게 웃으셨다. 박중훈 씨가 여러 남녀 가수로 분장하고 립싱크로 노래하며 춤추는 장면에서는 그렇게 행복한 웃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좋아하시며 포복절도하셨다.
그래서 귀엽고 유쾌한 캐릭터가 TV에 나오면, 부엌에 계신 엄마에게 소리쳐 누구누구 나오니까 빨리 와서 보라고 알려 드렸다. 난 엄마가 세상만사 모두 잊고 아무 걱정 없이 사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는 그 얼굴이 참 좋았다. 2층짜리 쌍꺼풀을 가진 큰 엄마 눈이 하회탈처럼 가늘어지면서 터져 나오는 명랑한 웃음소리를 들으면 나는 일주일 내내 정서적으로 평안하고 행복했다. 그런 엄마의 웃음이 계속 터지게 하고 싶어서 신동엽 씨 같은 캐릭터에 질투를 느끼며 따라 해보고 연구하고 창의적 개그를 고민했다.
그래서인지 난 사람들에게 '잘 생겼다', '멋지다'는 소리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귀엽다’, ‘재치 있다’는 말은 종종종 들었다. 그 피드백에 무한히 기뻐했다. 엄마를 웃게 하는 아들로 완성돼 가는 중이니 말이다. 나는 재밌다고 생각하며 분위기 띄우려고 해준 말에 사람들이 안 웃고 썰렁한 반응을 보이면, 겉으론 남들 아랑곳하지 않고 내 말에 혼자 웃으며 얼렁뚱땅 넘어가도 속으로는 ‘살아온 게 이것밖에 안 되는군’ 하는 좌절감(?)에 절망한다.
엄마가 좋아한 신동엽 씨처럼 재밌고 귀여운 캐릭터 따라잡기는 집에서 간호하며 이어갔다. 큰 웃음 한방이 여의치 않으면 썰렁 개그 여러 개로 될 때까지 웃기려고 애쓰는 나의 꾸준함 때문인지 집에서 간호할 때 엄마는 종종 웃으셨다. 얼굴 신경에 한번 미소가 돌면 오래 머문다. 집에서 간호해 드리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썰렁한 개그에 웃으시는 모습 보고 곧 회복되실 줄 알았다. 그러나 가끔 그런 표정을 보여 주시다가 2004년 초 재활병원에 입원하신 뒤로는 거의 웃지 않으셨다.
이렇게 뇌신경이 손상된 고통 중에도 웃으시는 엄마를 보고 알게 되었다. 원래 엄마 성품은 명랑하고 웃음 많았는데 일상이 척박함의 연속이어서 무표정의 그늘만 남고 웃음이 이사가 버렸다는 것을. 난 간호하면서 엄마의 몸 상태뿐만 아니라 웃음이 돌아오도록 지켜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간호하면서 내 속 어딘가 숨은 ‘개그맨의 피 찾기!’를 탐구하며 연마했다. 언젠가는 그 큰 눈이 작아지며 엷게 퍼지는 미소에서 폭소로 상승하는 엄마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런 웃음이 돌아올 뿐 아니라 계속 행복하게 웃으시도록 난 재밌고 귀여운 캐릭터가 되려고 주변 사람들을 모르모트 삼아 연구했다. 그 연구는 어머니를 재활병원에 모시고 에세이 작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출판 편집자로 살아가면서 흔적만 남았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보니 호탕하게 한 번 크게 웃는 게 얼마나 어려운 세상인지 알게 된다. 문득문득 무표정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면 그 옛날 표정 없이 견디시던 엄마가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필사적으로 애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곳이다. 엄마가 필사적으로 애쓰며 나를 키우신 것처럼 나도 필사적으로 애쓰며 가장 노릇을 해가고 있다. 여가와 웃음이 내 아이들에게는 늘 있는 환경이기를 바라면서.
편한 운동화를 처음 신은 엄마
1994년 봄에 제대하고 여러 고민을 하며 복학을 준비하던 가을 무렵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갔다. 설악산 부근에 콘도를 잡고 1박 2일을 다녀왔다. 그 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편안한 러닝화를 빌려 신으셨다. 설악산 주변을 걸으면서 발이 가벼워 날아갈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여러 백화점에 발품을 팔며 다니며 다음 시즌 디자인을 파악하면서 숙녀복 도매 일을 한 어머니 발은 불편한 구두에 많이 상해 있었다. 설악산에 높이 올라가지 않고 중간에 파전 같은 음식을 사 먹고 가만히 어머니 손을 잡고 풍경을 감상하며 내려왔다. 손잡고 걸으면서 괜스레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감겨왔다.
운동화를 거의 처음 신어 본 어머니, 딱딱한 신발에 상해 가는 발로 가족을 챙기며 살아온 어머니께 평생 편한 운동화만 신어드리게 할 순 없을까? 생각하며. 새어 나오는 눈물을 들킬까 봐 두 눈 질끈 감고 몰래 한숨을 지었다.
난 그때 제대하면 뭐든 잘 해낼 줄 알았다. 어디라도 뚫어낼 송곳 같은 모습으로 사회의 어디라도 찔러대며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복학을 앞두고 몇 달을 지내오며 늘어난 건 두려움과 공허함이었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전적으로 인내하며 사는데,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짐인 것만 같아 무언지 모를 통증이 가슴에 저며왔다.
강릉 바닷가의 방파제에 앉아 오징어 회를 먹다가 몇 젓가락 집어먹고, 혼자 파도가 쳐 올라오는 바다 가까이 다가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하는지, 소망을 가지고 잘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은 어찌나 초라해 보이는지, 군 복무 마치고 이제 세상에 나왔으면서 왜 이리 시간이 흐를수록 두려움만 차오르는지 많이 묻고 생각했다. 그러다 채울 수 없는 공허감에 시달리지 말고 편한 운동화 한번 신어볼 여유조차 갖지 못한 엄마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 어머니의 모습에서 힘을 얻고 새로운 자신감을 채워서 달려갈 목표를 정하고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허하고 인생의 좌표를 찾지 못하며 고민했던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질 무렵 내 소명은 분명해졌고, 어머니 발은 매일 따뜻한 물로 씻고 마사지하며 시장 일하며 상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이 부드러운 살결로 유지시켰다. 가끔 엄마 발바닥의 비누 향을 맡으며 내 볼에 비벼 보고 뽀뽀도 했다. 20년이나 걷지 못하여 근육이 줄어 종아리가 많이 야위어지긴 했지만, 어머니 발에 편한 운동화는 내가 되었다. 나이키보다 좋은 엄마의 신발이 되는 기쁨을 얻었다.
"엄마! 나를 신고 늘 편안하게 쉬세요. 다리 아픈 거 참으며 피곤했던 발품도 필요 없고, 딱딱한 구두도 신을 일 없습니다. 내가 계속 엄마의 가장 편한 운동화가 될게요."
엄마와 고기 밥상
아주 가끔 엄마의 밥상을 받았다. 대학생 시절, 주말 저녁에 내가 집에 있을 때다. 건축공학 전공 특성상 학교 부근 작업실에서 밤을 새우며 자취생활을 했고, 전공 공부보다 열정을 더 쏟은 기독 동아리 활동에다 주말에는 교회 대학부 모임에 참석하느라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엄마의 사랑이 담긴 밥상을 받으면 그 평안한 기쁨이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꼭 고기를 구워주셨다. 주일 예배는 나와 같은 시간에 교회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LA갈비로 점심을 해주셨다. 곁에서 밥을 챙겨주지 못하는 오랜 시간에 늘 미안해하셨다. 그래서 난 병상의 엄마에게 제일 자주 하는 말이 “나 밥 잘 챙겨 먹고 있어요!”이다. 걱정하실 부분이 무엇인지 뻔히 보이니 인사말로 밥 잘 먹고 있단 얘기부터 한다.
집에서 내가 못 먹고 못 자고 간호할 때 어쩌다 외출하면 친구들에게 삼겹살을 대접받았다. 예전에 어머니와 고기를 먹을 때와 친구들과 먹을 때 큰 차이점을 발견한다. 누군가 고기를 구우며 섬기는 사람이 없으면 고기는 먹기가 참 불편한 음식이다. 자주 그러진 않지만 내가 친구들과 고기를 먹을 때 집게를 들고 굽는 역할로 자원하면 맛있게 익은 것보다 탔거나 찌꺼기를 먹게 된다. 엄마가 구워주는 고기를 먹을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내 친구들이 이상한 놈들은 아니었다.
내가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르다 하신 어머니, 바깥일을 하느라 손수 챙겨 주지 못한 밥상 때문에 늘 미안해하신 어머니, 아들은 잘 익은 맛있는 부위를 먹는 동안 탄 거나 찌꺼기 드시면서 즐거워하신 어머니, 그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한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신을 위해 애쓸 수 있는 시간을 듬뿍 누리고 있어 고맙기만 했다. 간호할 때 나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며 열심히 잘 챙겨 먹었다. 건강하게 간호할 수 있는 체력을 얻기 위해 풀만 먹고도 가장 힘센 짐승인 코끼리를 생각하며 그린 필드의 밥상이라도 만족하며 열심히 먹었다. 삼겹살 먹으러 나오라는 친구의 전화가 걸려오면 절대 튕기지 않고 쏜살같이 나갔다. 그리고 고기는 내가 굽지 않았다!
필요
어머니는 내게 옷을 참 잘 사주셨다. 내가 원하기 전에 멋지고 좋은 옷을 골라서 근사한 모습의 아들로 코디해 주셨다. 놀랍게도 내가 무슨 일인가에 시달리며 마음이 힘들었던 날, 어떻게 아셨는지 옷 선물로 내 기분을 전환시켜 주신 적이 많았다. 난 어머니 덕분에 옷을 고르는 방법도 모르고 살 필요도 느끼지 않은 시절부터 베스트 드레서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집에 계실 때 내가 외출할 때면 현관에 배웅하면서 옷차림에 대한 조언을 꼼꼼히 해주셨다.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내 주며 옷매무새와 단추를 만져 주셨다.
4학년 봄에 건축기사 시험에 떨어진 날, 축 처진 몸으로 집에 오니 책상 위에는 봄여름에 화사하게 입을 청바지와 티셔츠 몇 벌이 쇼핑백에 담겨 있었다. 일하시느라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는 생활에도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계신 듯 항상 필요를 먼저 채워 주셨다. 한밤중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생각에 무심코 냉장고를 열어보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몬드 봉봉이 가득 담긴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우리 모자의 기막힌 텔레파시에 탄성을 지르며 달콤한 사랑의 맛을 즐겼다. 주일 아침 내가 자율적으로 선택한 옷차림에 칭찬해 주는 엄마의 눈빛을 느끼며 함께 손잡고 교회 갈 때가 제일 행복했다. 예배당에 착석하자마자 엄마는 나보다 훨씬 길게 기도하셨는데, 일찍 기도를 마친 나는 예배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성경책을 뒤적거리다가 기도하는 엄마 콧등을 검지로 슬쩍 건드리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엄마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기도를 그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그 긴 기도의 응답으로 내 삶은 절망과 얼룩으로 어두워지지 않고 작가 생활, 취직, 결혼의 일상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가치 있게 사는 삶을 고민하는 것은 어머니의 기도 힘이다.
나의 필요를 적절한 때에 채워 주신 어머니를 위해 내가 어머니의 필요를 채워 드린 시간을 보낸 뒤, 생동감 있게 다녀야겠단 생각으로 외출할 때마다 꼼꼼히 코디에 신경을 쓴다.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누가 봐도 힘든 고난을 견디고 있는 사람인 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유쾌 발랄한 모습으로 코디하는 것을 즐긴다. 어머니가 좋아하신 스타일이 밝고 경쾌하면서 진중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기에 난 운동을 열심히 하고 밝은 차림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경제성, 디자인, 질감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유행을 타지 않는 좋은 옷을 사주신 어머니께 영향을 받아, 절제력이 있고 은은한 매력을 풍기면서 신뢰하고 소통하는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나이 먹어갈수록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어 갈 것이다. 오랜 시간 함께 있을수록 싫증 나지 않고 편안하며 부드럽게 잘 맞는 좋은 옷과 같은 가장인지 돌아본다. 때에 맞춰 내 필요를 베스트로 채워 주신 어머니는 하늘에서 지금 내가 꿈꾸며 기대하는 모든 일들을 알고 계시며 기도로 지원해 주고 계실 것이다. 내게 일어나는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면 눈을 세 번씩이나 깜빡거리며 기쁨을 표현하셨던 어머니가 그립니다. 어머니처럼 나도 아내와 아이들을 베스트 드레서로 코디해주고 싶고, 내가 길게 기도할 때 몰래 다가와 내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장난치는 못된 아들이 곁에서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