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불안해하지 마 1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마흔아홉의 백수 가장이다. 퇴사한 지 1년이 지났다. 소셜벤처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 외에는 수입이 없었다. 마지막 회사는 나에게 꼭 맞는 분위기였다. 의사 결정, 기획, 출근 시간 모두 내가 결정할 수 있었다. 보고서도 거의 없었고, 외근 일정도 스스로 정하고, 휴가 신청도 자유로웠다. 팀원 없이 혼자 출판팀 세팅을 마치고 다양한 기획 아이템도 정비해 두었는데 심각한 재정 위기가 몰려왔다. 월급이 계속 밀리는 것은 개인 대출을 통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어도 내가 출간한 책과 앞으로 기획해 갈 책에 대한 사업비가 묘연했다. 고심 끝에 대표에게 과감하게 구조 조정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내용을 올리고 퇴사의 뜻을 밝혔다. 어려운 회사에 숟가락 하나라도 덜어내는 것만이 도움이 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경영난에 내 능력과 인맥으로는 도움이 될 길이 보이지 않아 심각한 무기력감이 덮쳐왔다. 내 번아웃은 우울증이었다. 직장 생활이 무너진 데다 조금씩 안 좋아지다가 심하게 악화돼 가는 어머니의 장기 병환에서 겪는 답답함, 소외감이 숨쉬기 어렵게 만들었다. 돈 문제는 계속 눌러왔고 사방이 어둡고 답답한 벽이었다.
가장으로서 돈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무에 출판 콘텐츠업로서는 답이 없다.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책을 만들어 가정의 필요를 채운다는 건 우직한 미련함이다. 부수입으로 도움이 돼 온 강연 요청도 뜸해진 지 오래다. 병원에서 장기 중환자로 계신 어머니를 뵙고 간호해 드리면서 병원비 마련하고 직장 일하면서 지쳐갔다. 식물인간의 어머니를 내가 간호해 드리는 일에는 힘들다거나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지 그 돈 문제가 버거웠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동안 백수로 8년을 지낸 시기를 빼고 출판 일과 글쓰기, 강연 등으로 병원비를 마련하고 가족의 생계비를 해결해 왔다. 오랜 세월 신용불량의 위기에 처해 있었어도 신용불량자가 된 적 없고 가족을 굶기거나 파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버는 출판사 급여로 어머니 병원비를 어떻게 해결해 왔냐고 신기해한다. 그 병원비 다 모으면 몇 억 정도의 전세금은 충분히 뽑았을 것이다. 돌아보면 내가 버는 돈보다 도움을 받은 돈이 훨씬 많았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천사, 까마귀, 만나가 다 있었다. 그 결핍은 아름다운 추억이다.
돈 문제 소재의 첫 편은 가벼운 서론의 에피소드다.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당황스럽다. 지나간 돈 문제는 감동이지만 지금 현실에 마주하는 돈 문제는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다. 이 고통을 견딜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내 삶에 있는 만나들을 잘 기억해야 한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신해철의 곡 <money>의 가사이다. 나는 넥스트의 앨범으로 신해철을 천재 뮤지션으로 인정한다. 그의 가사에는 사회 고발, 풍자에 대한 감각이 탁월하게 담겨 있다.
온 세상에서 이제 너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어
수많은 사람들이 너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때론 키스처럼 달콤한 꿈을 만들지만
때론 독약처럼 쓰디쓴 절망을 만들고
사람보다도 위에 있고 종교보다도 강하다
겉으로는 다 아니라고 말을 하지만
약한 자는 밟아 버린다
강한 자에겐 편하다
경배하라 그 이름은 돈 돈 돈
돈이 종교보다도 강하다는 말이 귓전을 때린다. 하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돈 문제를 빼면 내용이 거의 없다. 삶의 문제는 대부분 돈과 연결돼 있다. 생존이 목적이던 시대를 지나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로 다수의 빈자를 위축시키는 시대에서 억대 연봉자도 돈이 부족하다고 한다. 돈은 잘 먹고사니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공포감을 안긴다. 오늘 겨우 살았지만 내일은 심각해질 거라는 실체 없는 불안감으로 불면과 악몽의 밤을 겪게 한다.
나는 연봉을 4천만 원 넘게 받아본 적이 없다. 첫 직장의 홍보팀에서 2천4백만 원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해 3천5백만 원의 정규직까지 오른 뒤 회사를 옮기면서 그 정도 수준에서 10년 이상 출판사 일을 했다. 아이가 둘 태어났고, 어머니 병원비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감당하기 힘든 지출로 매달 빠져나갔다. 집 문제는 안양 지역에 나온 23평 임대주택을 얻어 2년마다 추가 보증금을 내고 매달 임차료 지불하면서 9년째 살고 있다. 10년이 되면 이사할 집을 찾아야 한다.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을 얻은 건 큰 도움이 됐다. 그래도 매달 어머니 병원비를 빼고 남은 월급으로 생활해 나간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돈 문제로 지칠 수밖에 없는 삶이지만 돌아보면 은혜와 기적이란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청지기적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돈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물론 어렵다고 말한다. 단순하게 쉽게 돈을 말하는 분들을 나는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과거에 나는 강단에서 “크리스천이 어떻게 로또를 살 수 있냐, 우리는 만나로 사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지만,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 돈 문제에 답이 없을 때 로또를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과거에 했던 말을 거둘 수 있으면 거두고 싶다. 이렇게 바꾸어 말하련다. “얼마나 힘들면 로또를 사겠어요? 그래도 우리는 만나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형 교회에서 드러나는 탐욕의 문제들은 어둡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돈을 극복하며 사시는 분들은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라는 뜻이고 없어도 별 문제는 되지 않는다’는 중심을 지니고 계신다. 하나님이 돈을 주실 때는 꼭 필요한 쓸 일이 생기고, 실제로 중요한 일에는 반드시 필요한 물질을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나도 신뢰한다. 하지만 항상 돈 문제가 다시 혹은 낯설게 덮쳐 올 때마다 무겁고 두렵다. 만나를 경험했어도 어렵고 지치는 문제가 돈이다.
선교단체의 간사 사역자들은 직업상 실업자이면서 전국을 누비며 수련회와 자신의 필드에서 젊은이들을 돌본다. 10년 이상 사역해도 저축한 게 거의 없다. 대책이 없는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가정을 어렵게 꾸려가지만 실제로 밥을 굶거나 전기나 수도가 끊길 정도에 이르지는 않는다. 선교 여행을 가는 이들도 돈 없어서 비행기 못 타고 포기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대학생 때는 그런 간사의 삶을 동경했고 나도 그분들처럼 대학생 공동체의 리더로 살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야말로 구약의 만나를 경험하며 하루하루 필요한 만큼의 물질로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더라도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늘 이 고민과 싸우며 졸업을 맞이했다. 그러다 졸업시험 몇 과목을 남겨 둔 날 어머니가 뇌출혈로 의식을 잃으셨다.
1998년 7월은 병원에서 포기한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와서 내가 치료하며 간호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병원에 있을 때나 집에 와서나 돈 들어갈 일은 너무나 많았다. 혜민병원에서 어렵게 수술 후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어렵게 경희의료원으로 옮긴 뒤 매달 500만 원가량의 병원비가 들어갔다. 밑 빠진 독처럼 우리 집 재정은 계속 빠져나갔고, 어머니의 쾌유는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병원비 외에도 내게 개인적으로 필요한 교통비, 식비 등이 필요했는데 돌아보니 그 돈이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의료진으로부터 가망 없는 퇴원을 명 받고 집에 모시고 오기 전에 경희의료원에서 가장 오래 있었다. 낮에만 간병인을 쓰고 매일 밤과 아침, 주말과 주일은 내가 꼬박 간호해야 했다. 밥은 거의 굶다시피 하거나 병원 입구 부근 김밥 집에서 급하게 한 줄 먹고 병실로 급히 돌아오곤 했는데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배고픈 시장기로 괴롭지는 않았다. 6인 병실의 앞 베드 남매 보호자가 도시락을 나눠주기도 했고, 옆 베드 할머니의 아들이 강남의 부유한 분이었는데 자장면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러나 1일 1식으로 사는 날이 많았다. 중요한 건 생업전선에 뛰어든 동생에게 용돈을 타지 않으면서 주머니가 비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혜민병원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를 돌볼 때, 제자들교회 청년회 임원들이 방문해서 헌금을 모아 주었다. 나는 대학부에 있었기 때문에 같은 교회라는 것 외에는 관계가 없던 선배들이 주신 돈을 받기가 쑥스러웠지만 하나님이 보내시는 도움으로 여기고 받았다. 나는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관심이 없었다면 20년 동안 어머니의 무의식 상태를 돌보는 생활은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경희의료원 신경외과 병동에서는 정신을 좀 차리고 PC 통신 천리안 IVF 동호회에 기도제목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동호회에서 내 글을 눈여겨본 분이 병실을 찾아와 주었다. 그녀는 암 말기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어 내 글에 깊이 공감해 주었다. 그녀는 야맹증이 있어 밤 시간 외출이 어려운데도 내가 간호하는 어머니 병실에서 늦게까지 말동무를 해주었다. 병실에 올 때 내게 고기를 사주려고 작정했다고 하나, 수시로 석션과 체위 변경을 해야 해서 어머니 곁을 비울 수 없었다. 우리는 분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끼리 먹는 떡볶이와 순대는 참 맛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고 고마웠다. 돌아가기 전에 편지를 주고 갔는데 거기에 소정의 헌금이 있었다. 여유가 많지 않은데도 나와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고 내게 꼭 고기를 사 먹으라고 쓰여 있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나와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 나를 찾아온 그 달에 암 투병 중인 그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간병인과 교대한 시간에 빈소가 차려진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조문을 갔다. 두 시즌을 경희의료원 신경외과 병동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초여름 장례식장 주변에서 마주한 햇살에 슬픔과 낯섦에 당황했다. 그녀는 장례를 마친 뒤 어느 날 밤에 우리 병실 전화로 내게 안부를 묻다가 내가 잠시 통화를 중단하고 어머니 기저귀를 갈 때 수화기 너머로 펑펑 울었다. 하늘에 떠나보낸 어머니가 그립다는 그 울음에 그저 들어주는 것 외에는 내가 전할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후에 대학생 선교단체 간사로 일한 정화, 그녀의 이름이다.
그 천리안 동호회에 경희대 대학원에 다니던 박경규라는 친구가 있었다. 경희대에서 주일 모임이 끝나면 어머니 병실에 찾아와 방울토마토와 설교 테이프를 건네주었다. 내가 교대해 줄 사람이 없어서 주일에 예배도 드리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 대신 간호해 주고 나를 병원 내 교회에 다녀올 수 있게 해주려고 했다. 전문적인 간호 테크닉이 필요한 중환자 간호임을 알고는 아쉬워했다. 그는 자주 병실에 찾아와 주었다. 몇 달 후 경규는 대학원 졸업 선물로 받은 구두티켓을, 몇 번을 망설이다 마음 변하기 전에 해치우는 거라며 등기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캄보디아 선교사로 떠났다. 정화도 경규도 어머니 간호하면서 처음 얼굴을 본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출애굽기의 만나를 경험했다. 경규는 지금도 연락하는 20년지기 친구가 되었다. 세 아이의 아빠로 다이내믹하게 살아간다. 세상 인연이 참 단순하다. 경규의 아내는 대학시절 내 성경공부 제자의 동생이다.
봄이 지나 초여름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한양대에서 열린 ‘96선교한국’에 조장으로 참석했다. 당시 내 조원 중에 목사님 딸이면서 신학교 선교학을 전공하는 자매가 있었다. 수련회에 몇 번 와서 나를 본 적 있다며 알아봐 주었다. 우리는 마치 남매처럼 친하게 꼭 붙어 다니며 다양한 얘기를 나눴다. 그 조원이 2년 만에 갑자기 내게 안부 전화를 해주었다.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의식이 없는 어머니를 경희의료원에서 간호 중이라는 말에 곧 병실로 찾아왔다.
난 어렸을 때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혼자 밥을 차려 먹은 적이 종종 있었는데 주로 물 말은 밥에 간장을 찍어 먹었다. 작은 간장종지에 숟가락을 넣으면 숟가락 끝에 간장이 조금 걸린다. 그게 반찬의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편식이 심했고, 고추는 죽어도 못 먹는다. 또 병원에선 매일 같이 김밥 한 줄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을 때라 김밥에 이력이 나 있었다.
“오빠 식사 안 했죠? 내가 김밥 싸왔어요.”
“어... 음... 그래, 오늘은 니가 싸온 거 먹어 보자. 무슨 김밥인데?”
“이거 고추김밥이에요.”
‘허걱!(90년대 말에는 지금의 ‘헐’이 ‘허걱’이었다)’
그 조원은 웃을 일 없던 내게 한참 재잘거리며 기쁨조 역할을 톡톡히 하며 미소 짓게 해주다가 가기 전에 조심스레 봉투를 내밀었다. 오빠 사는 얘기 듣고 마음이 아파서 헌금하고 싶었다고. 거기엔 대학생 신분으로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그때가 내 주머니 사정이 아주 안 좋아졌을 때다. 미안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지만, 안 받을 수도 없었다. 남은 고추김밥을 먹다가 울컥했다. 고추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울었다.
(이런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서 다음 글에 이어서 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