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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가설, 믿음으로 살면 살아진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 2

by 황교진



중환자 가족이 있으면 가장 힘든 사람은 환자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수영을 못해도 구하려고 뛰어드는 부모처럼 자신을 돌볼 여력을 갖지 않고 고통의 복판에 들어간다. 돈과 시간이 끝없이 소모되는 가정 재난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더 외롭고 고단해진다. 다른 가족들에게 상처를 겪고 아픔에 더해지는 아픔들을 느낄 새도 없이 환자를 돌본다.


가장 큰 문제는 경제력이다. 내 주변의 친척들 중에 어머니 병원비를 도울 만한 분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가정 재난에 거리를 두는 일이 다반사다. 과거에 우리 집에서 대학을 다닌 사촌 형님 한 분 정도 걱정해 주고 간혹 찾아와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청춘의 시간을 모조리 집에서 어머니 생명을 보존하는 역할로 보낸 내게 돈 문제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문제였고, 그 해결점은 기도 응답이었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수입이 없는 청년 백수로 어머니 간호를 시작했을 때부터 '당시는 느끼지 못한' 돌봄이 있었다. 어머니의 회복만을 기도하고 차도 없는 절망의 감정에서 그 돌봄 현상들을 체감하지는 못했다. 나는 회복의 응답은 없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공급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후원으로 어머니에게 필요한 기저귀, 레빈튜브, T케뉼라 등을 제때에 살 수 있었고, 땀에 절어 목마를 때 갈증은 촉촉하게 해갈됐다. IMF가 터진 뒤 거의 동시에 어머니와 병원 생활을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치료 용품의 상당수를 보호자가 의료기구점에서 구입해 오게 했다. 나는 의료기구점에 갈 때마다 지갑이 비지 않는 경험을 하면서도 당시에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는지 잘 알지 못했다. 수시로 공격해 오는 돌발적인 스트레스로 죽음으로의 도피가 자주 유혹해 왔다. 1년이 지나간 뒤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스킨십이 풍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이 낫지 않지만 병을 견디도록 도와주신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내 만족감과 상관없이 내게 필요한 것은 차근차근 주어졌다.


서울대병원은 어머니의 세 번째 병원이었고, 집으로 모시고 오기 전 마지막 병원이었다. 좀 더 깊이 있는 의료진의 치료로 조금은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받은 고가의 수많은 검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퇴원 명령을 받게 되었다. 차라리 오랫동안 익숙했던 경희의료원의 3517 병실 식구들과 매일 함께 기도 모임을 가지던 때가 그리웠다. 초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견뎌온 시기를 그리워하며 현실을 겨우 받아들이고 퇴원 준비를 했다.


공대생인 내가 집에서 어머니를 어떻게 간호할까?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정신은 복잡했고 손발은 계속 어머니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느라 분주했다. 그때 교회에서 최 목사님이 방문해 주셨다. 바로 전 주일에 열었던 교회 바자회의 수익금을 전해 주셨는데 70여만 원이나 되었다. 그 돈은 집에서 어머니 간호하는 데 필요한 병원 침대, 석션기, 치료 물품들 구입에 요긴에게 쓰였다. 환자복과 약품들까지 사고 나니 딱 70여만 원이 들었다.


퇴원하던 날, 혜화동의 여름 빛깔은 참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슬펐다. 병원에서 집으로 중환자인 어머니를 옮겨야 하는 절박함에서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 서운했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현실, 내가 혼자 해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큰 상처였고 아픔이었다.

앰뷸런스로 집에 도착하자 낮에만 어머니를 간병해 주던 간병인과 결별하고 혼자 간호를 시작했다. 낯선 가정용 석션기로 수시로 석션하고 씻기고 죽과 약을 드리고 체위 변경에 기저귀 갈기, 석션할 때마다 괴로워하시는 어머니 표정. 나는 숨 쉴 틈도 없이 힘겨웠다. 따뜻하게 데운 경관식 죽을 주사기에 넣어 드리다가 창밖의 햇빛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져 그칠 줄 몰랐다.


강변역 부근에 살던 우리 집 바로 앞에 신축된 테크노마트 건물이 내가 존재하는 세상이 아닌 액자 속 그림처럼 느껴졌다. 밤을 새우고 등골이 쑤신 몸으로 어머니 침상 목욕을 시키고 내 체력과 정신력으로 견디기 힘든 24시간 간호에 점차 적응해 갔다. 점점 이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6월부터 가장 섭섭하게 자리 잡고 있던 것이 보험금 문제였다. 사실 어머니가 살뜰하게 보험을 들어놨더라면 사망에 해당하는 장애 1급은 억대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우리가 지출한 것에 비하면 기껏 3천만 원밖에 안 되는 보험금이 계속 지급 거절되었다. 보험사 측에서 책정한 보상금은 200만 원이었다. 한 달 병원비도 안 되는 금액을 받고 정리할 수는 없었다. 소송을 하라고 으름장을 놓던 보험회사를 향해 기도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 기도 부탁을 하고 여리고성 허물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기도했다. 밤에 가게에 나가 일하는 동생이 어머니 간호를 교대해 주면 집에서 가까운 장신대에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다. 정문 옆 주기철목사순교기도탑에 올라가 바닥에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한 지 4개월이 지나 어머니 약을 타러 간 서울대병원에서 보험회사 직원을 만났다. 재조사를 하러 온 보험사 직원은 보상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굳건히 전달했다. 내가 대학원을 휴학하고 집에서 간호하는 현실을 차분히 대화한 뒤 담당 의사 선생님 소견으로 결정하자고 했다. 보험사 직원은 의사 소견이 외부 충격에 의한 뇌출혈이어야 한다고 했다. 방금 어머니 약 처방을 받은 선생님의 진료실을 다시 찾아갔다. 선생님은 어머니 CT 사진을 들고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외상에 의한 뇌출혈이군요” 하시며 옆에 있던 인턴 선생님에게 진단서를 써주란 말을 남기고 다음 스케줄로 바삐 가셨다.


사실 어머니는 고단한 가게 일과 스트레스로 인한 뇌출혈에 가까웠고, 재해 보상금을 타기에 애매한 요소가 있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그런 갈등에 처한 환자를 자주 봐오셨는지 내 편을 들어주신 것 같다. 보험사 직원은 반론을 펼칠 시간도 없었다. 진료실을 나오면서 오히려 내게 악수를 청하며 이 보상금은 꼭 드려야 할 것 같다며 그동안 죄송했다는 인사도 전해 주었다.


어머니 간호하며 이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것을 그때 깊이 실감했다. 이토록 돈 문제는 직접적인 감각으로 터치한다. 어머니 입원 기간 동안 매일 들러 기도한 서울대병원 교회에서 한참을 울다 나왔다. 그렇게 받은 보험금으로 1년을 견뎠다. 내가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영양사 역할을 다하고 있었으니 의료 소모품 값, 식재료 값만 있으면 견딜 수 있었다.


통장 잔고가 떨어지면 다시 채워지는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날씨도 선선해지고 통장도 홀쭉해진 어느 가을날, 교회 청년부의 두 간사님과 임원들이 우리 집에 방문해 주었다. 꽤 많은 지목 헌금을 주고 가셨다. 내 통장은 바닥난 상태로 1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그 덕에 선교 후원금을 약속했지만, 몇 달을 후원하지 못한 후배이자 파키스탄 선교사에게 후원금을 이체시킬 수 있었다. 가난할 때 받는 보상은 다른 나눔을 가능케 한다. 돈은 통장이 부유한 사람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나눈다. 두세 달 간 어머니께 필요한 물건들을 넉넉하게 장 보면서 그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새해가 되면서 대학원 휴학기간 만료로 재적의 위기를 맞았다. 다시 복학할 수 없는 형편이라 재적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입학하며 납부한 등록금이 증발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건축구조 대학원 공부보다 신학 공부에 관심이 기울어져 있었다. 낮에 잠깐 쉴 때 잠을 보충해야 하는데 그렇게 보내기엔 청춘의 시간이 아까워 자전거 타고 장로회신학대학에 자주 갔다. 채플실과 기도실에서 기도하면서 신학 공부에 대한 열망이 더해졌다.


어머니가 몸까지 상하며 고생하신 수고의 대가로 지불한 공대대학원 입학금은 400만 원에 달했다. 입학만 해두고 수업을 거의 받지 않고 휴학한 상태에서 입학금을 잊기가 힘들었다. 나는 학교에서 그절반만이라도 돌려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대학원 교학과는 방학 중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오전에 어머니 목욕과 치료를 마치고 오후 늦게 학교에 찾아갔다.

어머니 간호하며 오전 시간을 집 밖에서 쓴 적이 8년 동안 하루도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받을 때도 새벽에 일어나 치료와 목욕을 다해놓고 다녀왔고, 동원예비군 훈련은 어머니 간호 중이란 증빙을 하고 출퇴근 훈련으로 받았다.


건축구조 대학원 사무실에 가서 자퇴서를 제출하고 오후 4시쯤 교무과에 찾아갔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다행히 남자 직원 한 분이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등록금 환불에 대한 가능성을 여쭈었다. 그런데 내가 방문한 바로 전 주에 교육부에서 내려온 공문에 등록금 문제를 학생 위주로 처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등록금 환불에 대한 전례가 없지만 내가 최초로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안 된다고 하면 수긍하고 귀가할 참이었다. 그분은 내가 받을 수 있는 금액은 입학금 외 부수적인 금액은 제하고 수업료만 해당된다고 했다. 그 수업료는 신기하게도 입학금의 절반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줄 알았으면 다 돌려달라고 기도하는 건데!’

웃음이 났고 눈물도 났다.


불가능하리라 여겨지는 상황이 가능한 현실로 바뀌어 갔다. 그때 들어온 수업료로 다시 통장의 배가 불렀다. 1999년 봄부터 6개월간 그 수업료를 쪼개어 쓰면서 잘 버틸 수 있었다.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게 만들었던 실연도 겪었다. 난 헤어짐을 통해 책임지는 사랑에 대해 묵상하면서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매일 밤 어머니 병원 침대 옆 좁은 공간에서 운동을 했다. 특별한 운동 기구 없이 방바닥과 장롱 아래 틈을 기구 삼아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를 꾸준히 했다. 줄어들던 근육을 꽤 단단하게 불려놓았고 정신적으로 잡생각을 치우고 강해졌다. 그 사이에 문학청년의 감성이 깊어져 틈틈이 글을 쓰며 치유해 갔다.


7월 들어 통장 잔고가 6천 원을 가리켰다. 수없이 드라이한 상황에 꿋꿋해 온 터라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환자였지만 시어머니인 할머님은 건강하셨다. 강원도에서 큰아버지와 지내시기 전까지는 어머님이 모셨다. 어렸을 때부터 난 친할머니 다음 날이 내 생일이라 피해(?)를 입었다. 매년 할머님 생신 축하하러 오신 친척 분들이 내 생일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서울을 방문한 친척들이 어머니 간호하는 데 쓰라고 조금씩 보태 주셨고, 내 생일도 기억해 주셨다. 나이 서른에 친척들 돈을 받는 게 그다지 기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통장이 비어 기도 중에 들어온 돈들이라 넙죽 입금시켰다. 교회 청년부에서도 내 생일 선물로 가장 필요한 것이 이거란 생각이 들었다며 축하 카드와 현금을 보내 주었다.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받으라는 코멘트도 곁들여서... 보내는 사람 이름이 적히지 않은 지목 헌금도 받아서 결국 며칠 만에 20만 6천 원이 되었다. 내가 알 수 없는 순간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매번 살아갈 힘을 주고 계셨다.


집에서 병간호로 사계절이 흐르자 초기의 두려움과 달리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알아갔다. 나는 주부처럼 장을 보면서 각종 야채, 채소 값부터 식료품, 세재 등의 최저값과 최적의 물품이 무엇인지 구별했고, 단위 개수에 대한 단가 비교표를 머릿속에 입력해 두었다. 짧은 시간에 장을 보아도 가장 경제적으로 마트를 쉽게 휘저어 올 수 있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마그넷(후에 롯데마트가 됨)이 5분 거리라 많은 덕을 보고 있다. 어머니 치료에 많이 쓰이는 식염수도 아파트 입구에 있는 약국이 종로처럼 도매로 판매한다. 이런 작은 일들이 내게는 큰 감동이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어머니를 호플리스 퇴원시키기 얼마 전에 새로 문을 연 곳들이다. 동네 밖을 떠날 시간이 없는 내게 유리하도록 모여 있다. 그 가게들을 보면서 나는 너무 크게 염려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마침내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염려했던 모든 가설들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가장 위대한 가설이 진실이란 것을 체험했다. 어려운 비극을 헤쳐 나가려는 자에게는 길이 보인다. 가장 큰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돌봄 제공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간혹 정서적인 큰 파탄을 맞아도 감당해 가려는 의지와 믿음을 신뢰하면 치유가 일어난다. 그 믿음 없이는 죽은 삶과 다름없는 현실의 큰 고통은 내 힘이 아닌 외부의 도움으로 극복이 된다.


평생 돈에 대해 자유한 자본가는 이런 삶의 환희를 알 수 없다. 젊은 날에 그런 환희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었던 것이 내게 큰 재산이다.


3부, 4부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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