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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NA Jul 26. 2021

침묵과의 대화

나는 예전에 나무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쓸데없는 욕심으로 가득 찬 나를 혐오하던 시절이었다. 거리의 나무들을 누구보다 빠르게 지나치며 바쁘게 걸었다. 그래서 가끔 나무를 바라볼 때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말없는 것들의 초연함 앞에서 느끼는 수치심이 인간으로서 나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 직감했다. 그래서 나는 나무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가만히 서서 나무가 하고 싶은 말을 들으라고. 그게 벌써 십 년 전이고 나는 여전히 허둥지둥 거리를 방황하지만 예전보다 더 자주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 


맨 정신으로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함께 죽자. 그 사람은 그렇게 말했고 술에 잔뜩 취한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다음날 아침 술에 깨고 정신이 들기 시작하면 나는 그런 생각을 주문처럼 하곤 했다. 그의 전 애인은 몇 년 전에 죽었다. 물론 예정대로라면 그도 함께 죽었어야 했다. 함께 약을 먹었는데 그 사람만 살아남았다. 그로부터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이 그를 괴롭혀왔다.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 그 사람은 틈만 나면 죽어버릴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나는 소문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나는 처음 본 순간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


왜 사람은 사랑을 할까?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세상이라는 것은 언제나 인간에게 어렵고 버거운 대상이라서 두 사람이 힘을 모아야만 살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살아야 하는 의미를 별로 알지 못하는 사람과 도무지 살아갈 의욕이 없는 두 사람이 만나자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사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할까? 그 사람은 매일 죽고 싶다고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죽고 싶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매일같이 그를 원망하면서도 그에 대한 연민인지 사랑인지 알 수 없는 마음들이 깊어져만 가서 어느 날부터 나 역시 그래 함께 죽자.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죽고 싶은 사람에게 죽고 싶은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매일 아침 나는 잠에서 깨면 거울 앞으로 가서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묶는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머리 끈이 끊어졌고 나는 머리를 묶을 수 없었다. 자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반복되는 고통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 평화로운 아침에 잊었다는 듯이 문득 모든 것이 산산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은 매일같이 내 마음을 접었다 피고 접었다 핀다.


어젯밤 우리는 오랜만에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취할 때까지 샴페인을 마셨다. 그는 시종일관 웃으며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끊이지 않고 말했다.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집까지 걸어갔다.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거리에는 온갖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으로 반짝거렸다. 어떤 나무는 비싼 모피 외투를 입은 노인 같았고 어떤 나무는 생애 처음으로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게 되어 신이 난 아가씨 같았다. 그러나 어떤 나무도 침착해 보이지 않았다. 모든 나무들이 지나치게 고독하거나 지나치게 들떠 있었다. 


우리들도 들떠 나무 아래를 거닐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침울해져 말없이 손을 놓고 다시 말없이 깍지를 꼈다. 어릴 때는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는데. 그는 가끔 화려한 조명이 어색한 듯 일루미네이션을 올려다보며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아주 조신한 귀부인의 흉내라도 내듯 호호호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집 앞의 가로등 아래에서 키스를 했다. 그 사람의 손이 떨리는 걸, 내 볼을 타고 그 사람의 눈물이 한 방울 흐르는 것을 나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우리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키스 없이 섹스를 했다. 할 말을 잃은 우리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화였다. 하나도 흥분되지 않는 슬픈 몸의 대화였다. 결국 우리는 그마저 그만두었다. 다시 말없이 침대에 나란히 누워 깍지를 꼈다. 


뭐가 그렇게 외로워? 나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냥.. 다.. 그 사람은 울먹거리며 간신히 대답했다.

내가 있는데도 외로워? 그러면 나는 뭐야? 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야? 더 이상 느낄 서운함도 없이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냥.. 인간이라는 게 싫어. 인간이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어.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리는 그.

인간이 대체 뭔데? 따지듯 묻는 나.

그냥.. 나는 아니야.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 왜 인간으로 태어났는지 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야.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얼굴로 다시 한 방울 눈물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그 눈물을 모르는 척할 수 없어 말했다. 그래 죽자. 같이 죽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일으켜 세워 부둥켜안으며 엉엉 울었다. 그러고는 미안해도 아닌. 사랑해도 아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와 나도 함께 엉엉 울었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일일지 나는 몰랐다. 그이는 신을 원망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사람의 부모를 그 사람의 첫사랑을 저주했다. 사랑은 원래 믿음과 배신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그 사람이 스스로 깨우치기 전에 믿음 없이 배신만을 보여준 그들을 원망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하루가 그에게는 왜 이다지도 버티기 힘든 하루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찬장 깊숙이 숨겨 두었던 약통을 꺼냈다. 냉장고를 열어 먹다 남은 와인병도 꺼냈다. 한 손에는 와인 한 병을 한 손에는 약통 한 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의 얼굴을 하고. 그제야 나는 정신이 들어 화들짝 놀랐다. 나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싱크대에 와인을 콸콸 쏟아 버리고 약병을 찬장 깊숙이 숨겨 두었다. 


나는 왜 그때 약을 버리지 않았던 걸까. 하다못해 와인이라도 남겨둘걸. 그 사람은 내가 잠든 새벽 혼자 잠에서 깨어 수돗물 한 모금과 한 움큼의 약을 마시고 죽어버렸다. 유서도 없이. 다음 날 아침 두 손으로 나의 손가락을 꽉 쥐고 웅크려 누워 있는 그의 몸이 너무 차가워서 나는 잠에서 깨기도 전에 그의 죽음을 직감했다. 아주 겁이 나서 일어나 보지도 못한 채 한참을 그렇게 누워 소리 없이 울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이 차갑고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다. 밤이 될 때까지. 다음 날이 될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안고 누워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사람이 썩어서 냄새가 날 때까지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렇게 나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도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내 배에서만 소리가 났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흐느끼며 나를 잡고 있는 딱딱한 그의 두 손을 뿌리쳤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쪼그려 앉아서 그 사람의 속눈썹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에 있어? 어디로 갔어? 나는 그 사람을 가볍게 흔들며 물었다. 기운이 없어서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사랑해? 나를 사랑은 했어? 응? 나는 두 손으로 그 사람의 마른 어깨를 감싸 안으며 토라진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게 물었다. 상관없어. 나는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어. 그런데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미안해.. 그 말을 하는데 마른 눈물이 흘렀다. 


사랑이란 뭘까? 그렇지만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정말 이 사람을 사랑했을까?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사랑했을까? 우리 두 사람이 나눈 마음은 사랑이었을까? 내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따라 죽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답도 없는 질문들이 퍼즐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배가 고팠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렇게 멋없고 비참한 것이구나.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나는 비어 있는 냉장고를 한 번 열어 확인하고 문도 잠그지 않은 채 집을 나와 집 앞 카페에 가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커피가 너무 뜨거워서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커피도 이렇게 뜨거운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차가워야만 하는 것인지. 한참을 울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주인의 인기척에 정신이 들어 손수건을 건네받아 눈물을 닦고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한 입을 먹기까지는 너무 힘들었는데 먹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케이크 하나를 다 먹었다. 나는 계산을 하고 담담하게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가 경찰에 신고했다. 그 사람이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떠난 바람에 한동안 나는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아야 했고, 조금이나마 유예된 슬픔에 감사했다. 


 그가 죽은 지 사십 구일이 되던 날. 가족도 친구도 없이 오로지 함께 자주 가던 술집 사장과 나 단둘이서 초라하게 사구제를 지냈다. 사장이 아주 좋은 술을 가지고 와서 우리는 무덤에 뿌리고 남은 술을 함께 마셨다. 


“그래도 살아야지.” 사장은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살아지겠죠.” 나는 옅게 대답했다. 


우리는 금방 술에 취했다. 나는 사장을 돌려보내고 무덤가에 혼자 앉아 그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는 묘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사람은 피와 살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저 돌덩이 그리고 돌덩이에 깊게 파여 있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비석은 죽은 그의 손가락만큼 딱 그만큼 차가웠다. 나도 같이 갈까? 비석을 꼬옥 끌어안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때 아주 세찬 바람이 불었고 곁에 있는지도 몰랐던 커다란 나무에서 우수수 낙엽이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주저앉아 낙엽을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 한참이나 바람이 불었다. 한참이나 나무가 울었다. 외롭지 않겠어? 같이 안 가도 되겠어?.. 나 자기 없이 살아가도 될까? 나는 울먹거리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갑자기 바람이 잠잠해졌고 어디선가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보았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붙잡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듯 다정하게 아주 다정하게 나무를 바라보았더니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실이 느껴졌다. 나는 용기를 내어 두 손을 활짝 벌려 나무의 기둥을 끌어안았다. 죽지 않고 자주 올게. 자기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게. 나는 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 슬픔을, 이 생을 견뎌내겠다고 결심했다. 그것만이 그가 사랑을 믿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잊고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집에 가는 길에 커피 한잔을 마시고 케이크를 하나 먹었다. 집에 가서 밀린 빨래를 하다가 그의 양말 한 짝이 나와서 또 울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삼 년이 다 되어 간다. 가끔 그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 질 때 차가운 커피 한 잔을 들고 거리에 나와 가만히 나무를 바라본다. 그럴 때면 그도 나의 힘든 마음을 눈치채고 오늘도 수고했다고 고맙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가 죽고 나는 다시 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상하게 우리 둘이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그 느낌에 의지한 채 나는 또 이렇게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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