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소품집
남자는 흙 속에서 태어났다.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자는 흙 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 흙이 빗물을 마시는 소리 등을 들으며 남자는 상상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남자는 상상력이 풍부했다. 남자의 몸은 흙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는 한때 흙과 하나였다. 남자의 몸을 애벌레가 뚫고 간 적도 있었다. 흙 속에서 남자는 평화로웠다. 부지런한 개미가 모험가처럼 매일 바깥을 오가며,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남자의 몸은 해바라기 씨처럼 작았다. 남자는 가이아의 품에서 잠들었다. 남자는 어렴풋이 햇살을 느끼기도 했다.
남자는 아주 깊은 땅속에 묻혀 있었다. 언제 묻혔는지 남자는 기억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는 시간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무런 희망도 어둠도 없었다. 남자의 뼈는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썩었다. 남자에게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흙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소란스러움이 밀려 들어왔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형체 없는 남자의 귀가 온갖 촉각을 곤두세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서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쯤이에요.”
“아무런 표식도 없는데 어떻게 알죠?”
“여기 해바라기 꽃이 있잖아요.”
“제가 해바라기 씨를 같이 심었어요.”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자의 울음소리를 듣자, 남자의 심장에서 더 세게 피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일단 팔게요. 잠깐 앉아서 쉬고 계세요.”
“저도 같이 팔게요. 한시라도 빨리 꺼내 주고 싶어요.”
두 사람은 말없이 땅을 팠다. 남자는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와 강해지는 햇빛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피가 흐르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이러다 홍수라도 나겠어.” 개미가 볼멘소리로 불평했다.
“미안해 최대한 흐르지 않도록 노력해볼게.” 남자는 심장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여기 팔뼈가 하나 나왔어요.” 여자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오열하며 말했다.
더 이상 심장을 움켜쥘 수 없게 된 남자의 심장은 밑 빠진 독처럼 철철 피가 흘러넘쳤다.
두 사람은 한동안 더 땅을 팠다. 다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땅을 파며 남자의 뼛조각을 모았다.
여자가 마지막 뼛조각을 주워 품에 안으며 사랑한다 말했을 때 남자의 심장에서 피가 멈췄다. 남자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던 두 사람은 흙에 술을 뿌리고 향을 피우고 떠났다.
남자는 흙 속에서 태어났다.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이제 가까스로 피가 멈췄다. 남자는 뼈와 완전히 분리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남자는 이제 어디에나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해바라기 속에 머문다. 남자는 가끔 여자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여자가 가끔 해바라기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여자는 가끔 찾아와 해바라기에 물을 주고 간다. 여자는 가끔 찾아와 해바라기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남자는 깊은 어둠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더 이상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햇살을 느끼고 비를 맞는다. 남자는 더 이상 심장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다. 매일 밤 남자는 이대로 해바라기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