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공명

by 선향

오래 전,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들의 일인 창업을 도와주는 컨설턴트 일을 잠시 하던 때, 센터에 찾아온 한 중년 여성이 있었다.


“그 일을 왜 하세요?” 라는 내 물음에 그녀가 답했다.

“This is my life dream!”

이건 내 일생의 꿈이란 말이야! 하고 외치는 그녀의 눈과 입매가 울기 직전처럼 일그러지며 파르르 떨렸다. 순간,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레이시아 태생에 미국 시민권을 가진 육십 대의 여자 분이셨다. 그 분은 엉성하고 조잡해 보이는 그림을 보여주며 자신이 개발한 영어 교재와 교육법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내게 설득하려 애썼다. 자신이 개발한 영어 교육법으로 아들을 하버드 대학에 보냈기에 그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야기의 핵심은 더 없어지고 나는 그 분에게 자신의 프로그램을 요약하여 특화된 점을 설명할 수 있는 소개 자료를 다시 만들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일정한 체류 자격도 없이 방문 비자만으로 우리나라에 머물며 영어 학원과 출판사를 쫓아 다녔다. 2년간 그렇게 했지만 아무도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유치원 아이들을 위한 동물 그림에 단순한 영어 문장으로 이루어진 그 교재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정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자신이 개발하였다는 이해 불능의 영어 교재를 가지고 화교 출신의 말레이시아 사람이 이 나라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 학원 교육과 영어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그 분에게서 통 속에 갇혀 혼잣말을 하고 있는 사람의 고립이 느껴졌다.


그때의 나 역시 블로그 글을 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썼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다 보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홀로 중얼 중얼 혼잣말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물론 일기도 중얼거림이긴 하지만 아무도 내밀한 일기를 남들이 읽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글, 혹은 책쓰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면서 소통이 아닌 독백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이다.


'이건 내 일생의 꿈이란 말이야'하고 외치는 그 분을 보니 맹목적 꿈의 추구는 소통의 단절을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나를 이해 못하는 것은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해서라는 외곬수의 믿음. 그 믿음이 애처로운 모습으로 파르르 떠는 것을 보았을 때 순간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한없이 들어줄 걸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인 이정록의 문학콘서트에 간 적이 있다. 이정록 시인은 윤동주, 소월, 한용운 등 뛰어난 시인들은 분명한 소통의 의지가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 분들은 사람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고자 하는 의도를 명확하게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던 '꿈보다 소통', 소통이 화두이다.'


지금 글을 쓰는 나도 '꿈보다 소통'을 우선해야 할지도 모른다. 엄마가 하는 말과 생각이 우리 딸들에게는 살짝 우려스러운 모양이다. 바샤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마'하고 농담하듯 말리더니 요즘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쓴 글을 읽어보며 큰 딸이 말한다.


"엄마, 엄마와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을 수도 있잖아. '근원으로 돌아간다'거나 ‘순수 의식으로 현실을 창조한다', 뭐 이런 얘기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힘들 수 있어. 외계인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며 누군가는 사이비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유물론에 가까운 세계관을 가진 딸은 의식 성장, 근원, 혹은 채널링을 통한 영성 메시지에 대해 회의론적인 입장이다. 기자로 일하는 딸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쓰기와 플롯 짜기에 큰 관심이 있다. 그러기에 '읽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봤나?'는 질문을 내게 던지는 것이다.


지금 나는 '공명'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에 감정적, 심리적으로 공감하는 일부의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바샤의 말을 들으며 공명하고 공감했듯 누군가에게는 그의 메시지가 어느 누구의 말보다 더 큰 도움을 주는 삶의 원칙이 될 수도 있다.


오늘도 뉴스에는 삶의 온갖 어려움과 어둠에 내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샤는 우리가 어둠을 빛으로 바꿔 나가기 위해 이 삶을 선택해 왔다고 한다. 나는 바샤의 말을 좀 더 폭넓게 사람들에게 공명할 수 있도록 전하고 싶다. 어린 시절에 그 메시지를 접하고 세계관이 정립되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내가 개발한 조잡한 영어교재를 들고 한국에서 헤매는 말레이시아 아줌마인가? 그 두려움을 품은 채 나는 오늘도 애벌레처럼 은빛 실뭉치를 뿜어낸다. 평생 이천 편에 가까운 시를 쓰고도 익명으로 일곱 편만 공개하고 죽은 에밀리 디킨슨은 무슨 마음으로 시를 썼을까? 무명의 시인들이 시를 쓰는 마음을 헤아려본다.


애벌레가 죽어야 나비가 새로 태어난다.


꿈꾸는 애벌레


결국 나는 조그만

잎사귀를 갉으며

실을 뿜어내는

애벌레 아닐까


내 희미한 꿈은

나를 둘러싸버리는

은빛 실뭉치가

되어 버린다


하루를 먹어치우고

뱉어내는 것들이

어둠을 만들어낼 때

누가 약속했을까


오랜 어둠 뒤에

춤추는 봄이

나비를 기다리리라는 것을


나의 죽음이

나를 기다릴 뿐인지도 모른다

고치 속의 죽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