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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May 31. 2023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재미

다큐 입문기 5. 

1부, 2부 모두 파인컷이 끝났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편집의 과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처음에 OK 컷들을 모아서 구성에 맞게 단순배열하는 러프컷, 우리 말로는 가편집이 있고 그다음에는 방송에 적합하게 최종적으로 다듬는 파인컷(안 쓰는 말이지만 진편집)이 있다. 러프컷은 보통 PD가 혼자 편집하는 과정이고, 파인컷은 작가가 참여해서 숙의와 언쟁을 통해서 윤곽을 잡아나간다. 파인컷이 끝나면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 끝난 셈이다. 이후에는 CG나 색보정작업, 사운드믹스와 같은, 봤던 것을 보고 또 보는 반복작업의 연속이다. 


일단 큰 고개는 넘었다. 소회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뭔가 마음속에서 큰 것이 빠져나간 기분이 들어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힘든 작업이 끝나면 후련해야 하는데 왜 자식 시집 장가보내는, 서운한 기분이 들까? <심야괴담회> 때보다 더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다큐멘터리가 이런 것이구나. 다큐는 PD의 주관을 극대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 형식이고, 자신의 사고를 여지없이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서 수치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안겨주는 장르가 아닐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안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게 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감당하기 버거운 순간을 만나면 먼저 도망치든가,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소화할 수 있는 크기로 잘라서 야금야금, 꾸역꾸역 해나가야 한다. '이게 과연 될까?'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다가, 마침내 그 집적물을 마주하니 마냥 기쁘기보다 어색한 기분이 앞선다. 


다큐의 제목을 <한국범죄백서>로 정한 이유는 한국의 범죄를 다루면서 범죄 속에서 한국을 재발견하겠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범인 잡기에 치중해서 시청자들이 마치 셜록 홈스가 된 듯한 감정에 빠져들게 만드는 범죄물은 이미 범람할 지경이다. 나는 범죄를 통해서 한국을, 그러니까 범죄에 투영된 한국의 사회역사적 맥락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적인 특색을 지닌 범죄들, 그리고 범죄 사건을 통해서 당시의 시대를 회고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는 그때로부터 얼마나 진전되었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1부는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서 전통적 가치관과 융기하는 대중소비사회의 충돌, 교육열과 학벌주의의 폐단, 빈부격차를 보여주고 싶었고, 2부에서는 범죄의 시대적 변천과 다양한 양상들을 통해서 여성인권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물론 이런 심각한 메시지들은 고자극 영상들의 이면에 배회하도록 했다. 이 주제의식이 얼마나 잘 드러났는지는 아직은 우리 제작진만 알 것이지만, 보는 사람마다 인상적인 평을 쏟아내는 것을 보면 첫 다큐치고는 밥값은 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과연 이게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들인지 싶은 생경한 것들을 재삼 발견하고는 흥미를 느낀다. 다큐도 마찬가지다. 머릿속에서 어렴풋이 존재하던 것들이 실물로 가시화되는 과정 속에서 다큐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나는 <MBC스페셜>, <다큐플렉스>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내 첫 다큐이고, MBC 답지 않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 MBC를 비롯해, 지상파의 프로그램은 유독 시청자들에게 친절한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런 친절함은 제작진의 오만이다. 더 알고 싶으면 시청자들이 쉽게 검색하는 시대다. 조금 불친절해 보일지는 몰라도 영상의 힘을 믿고 드라이브를 걸고 싶었고, 나를 좋게 봐주고 이해해 주는 보직자들이 있을 때, 이 호기를 틈타 내가 가진 것을 오롯이 쏟아내고 싶었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은 재미있다. 문자 그대로의 재미는 아닐 것이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재미. 홀로 있던 피디가 원군을 규합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점차 바꿔가는 그런 재미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재미다. 물론 방송이 나가고 새 프로그램을 만날 때까지 다시 허무와 고독 속을 허우적거리겠지만. 


제작 과정 중 수시로 적은 메모
자막 디자인 관련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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