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환상, 시간적 환각
아래 선들은 서로 평행한가? 평행하지 않은가?
'선들이 평행한가? 평행하지 않은가?'라고 질문에 대하여,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위 그림을 보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를 풀 때 항상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훈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분명히 화살표의 방향에 따라서 아래로 내려가 있기도 하고, 위로 비스듬히 올라가 있어서 '평행하지 않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평행하지 않다면 문제를 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명히 눈에는 평행하지 않아 보이지만, 정답은 '평행하다'로 찍을 것이다. 당신은 참으로 영특하다.
지나가던 아내를 불러 세웠다. "이 선들이 평행해 보여? 평행하지 않아 보여?" 아내는 무심한 듯 한 마디를 뱉고는 휙 지나갔다. "평행하겠지. 평행 안 하면 문제를 냈겠어?" 김 빠진다. 그래, 한국 사람 인증!
그래서, 우리 사회가, 특히 우리나라 정치가 복잡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읽히는 대로 말하지 않는다. 무언가 감추어진 의도나 복선이 있지는 않은지 찾아내려고 애쓴다. 모두 다 시험 점수가 인생을 결정하는 우리 교육 때문이다. 정답은 정확히 몰라도 감추어진 출제자의 의도를 찾아서 답을 맞히도록 훈련하는 우리 교육 때문이다.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답을 찾았으니 아내와의 공통점은 한국의 학교 교육밖에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앞의 질문이 잘못되었다. '아래 선들은 평행한가? 평행하지 않은가?'라고 보이는 현상 너머의 진실을 물어본 나의 잘못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질문을 하여야 한다. "아래 선들은 평행한 것처럼 보이나? 평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정답은, '평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인 나와 당신의 눈을 통해 전달된 시각 정보를 뇌에서 약간 혼란스러워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평행하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우리를 '정상'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보였다면, 그대도 정상이다. 정상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것이 주는 안도감은 무척 크다. 하지만, 정상이라는 것이 항상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이번 그림처럼 그렇게 보이는 것이 정상이지만 옳은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정상적'이라는 말은 '동일한 다수'라는 의미다. 너가 나와 같고 나와 너가 같으면 정상이다. 그래서, 정상인 우리가 주류가 되어 틀렸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소수를 왕따 시키고 몰아낸다. 그리고 모두가 동의하는 정상의 세계가 된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이 말을 했던 그분들은 '믿어 볼만한' 세상에 살았었나 보다. 하지만, 뽀샵과 필터가 기본인 시대에 사는 우리가 어찌 보는 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아래 그림처럼, 정상적인 우리 눈에는 가로선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평행하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평행하다. 뭐, 우리가 집단적으로 평행하지 않다고 우기면 평행하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살다 보면.
평행하지 않다는 다수의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에 떠밀려 한쪽 구석에서 '그래도 직선은 평행하다'라며 조그맣게 읊조리고 있는 불쌍한 또 다른 갈릴레이 씨를 위해서 선을 그어 보았다.
[주] 나는 갈릴레이 갈릴레오인지 갈릴레오 갈릴레이인지 늘 헷갈렸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끌려가서 오지게 깨지고 난 뒤에 대충 '내가 잘 못 생각했나 보다'라고 얼버무리며 목숨을 건진 다음에 재판정에서 걸어 나오면서 혼잣말로 조그맣게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 혼잣말을 누가 듣고 후대에 남아있도록 기록하였는지 궁금할 뿐이다. 나도 같은 상황이면 "죽어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일단 목숨을 부지하고 작은 소리로 구시렁거리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해야 할지 갈등이 된다. 당신은 어떻게 할 계획인가?
하여튼, 몇 백 년 전 사람의 이름을 앞 뒤로 뒤섞어 사용한다고 해도 크게 탓할 사람은 없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 탓이 아니라 이름의 마지막 한 글자만 달리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인지 갈릴레이 갈릴레오인지 헷갈리게 한 부모님 탓이다. 그래도, 정확히 기억하고 싶다면 그가 '채소 '오이'를 좋아했음'을 떠올리면 된다. 물론 그가 오이를 좋아했는지 어떤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다. 사실 내가 오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다.
"내가 정확하고 틀림이 없다"라며 큰소리치고 "너는 대체 눈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느냐?'며 구석으로 내 몰았던 갈릴레이 씨에게 미안하다. 평행하네.
아래의 선들도 모두 평행하다. 평행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항상 정확하고, 나의 관점은 항상 옳다는 생각을 의심하자. 그리고, 겸손하게 살아가자.
가운데 부분을 비교해 보자. 양쪽보다 좁거나 넓다.
사각형 안의 두 선이 중앙을 지나갈 때 양쪽으로 휘어진다. 가운데 있는 검은 구멍이 블랙홀처럼 시간과 공간이 휘는 현상인가? 그런 고차원적인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그저 우리 몸의 시각 정보 처리가 덜떨어져서 그런 것뿐이다.
주변의 선들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 모두 평행한 직선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 탓이 아니다. 그 정도 수준으로 육체를 개선하지 못하고 지금 수준의 유전 정보로 넘겨준 우리 조상님 탓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천지창조 출시 일정이 바빠서 소프트웨어의 버그를 모두 잡지 못하고 인간 버전 1.0을 서둘러 세상에 내놓은 조물주의 탓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시계가 정확하다.'라고 한다고 오래전 어느 시인이 한탄을 한 적이 있다. 요즘이야 국제 표준시와 연동이 되는 스마트폰 덕분으로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서양 교회의 종탑 위에 달린 시계가 동네에서 유일한 시계이거나 소수 부유층만이 시계를 소유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내 시계가 정확하다'라고 제법 싸웠을 듯하다. 어느 시계가 정확한지 옳고 그름을 판정해 줄 기준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관을 세우고, 의견을 주장하는 방식도 비슷할 것이다. 때로는 다행스럽게도 특정 사안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국제 표준시와 연동되는 스마트폰처럼), 대부분은 자신이 접근 가능한 제한된 정보에 의존하여 이해할 수밖에 없고, 객관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편향된 의견(자신의 손목시계(스마트워치 아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전히 모두 '내 시계가 정확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당신의 시계가 정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각적 환상'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처럼, '항상' '내가 보는 눈은 틀림없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위의 구부러진 선들처럼, 나는 주위 환경과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객관적인 관점에서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한다는 자만심만 살짝 내려놓자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세상의 평화도 "나도 간혹 잘 못 보기도 한다."는 인식과 인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