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알가브의 겨울은 한국의 여름이다. 순간 한국이 여름일 때 추운 겨울이 되는 "포르투갈이 남반구에 위치해 있었나?"라고 잠시 헷갈리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포르투갈은 한국과 같이 북반구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포르투갈도 계절의 순환은 우리나라와 똑같다. 12월인 지금 시점이 겨울이다. 그래서 일 년 중 기온이 가장 낮다.
월별 평균 기온을 나타내는 도표에 나타난 것처럼 한국과 같이 겨울철(12-2월)의 평균 기온이 가장 낮고, 여름철(7-8월)이 가장 높다. 하지만, 알가브 지역은 위도가 서울과 유사한 북위 37도에 위치해 있음에도, 겨울에도 그리 춥지 않고 연중 온화하고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무슨 알가브의 겨울은 한국의 여름이라니? 한국에서는 고온다습한 여름에 산과 들에 풀이 무섭게 자라난다. 돌아서면 자라나 있는 잡초 제거를 전원생활의 단점으로 나열하고 있을 정도이다. 한국에서는 초록이 무성하고 풀 깎기에 바쁜 시기가 여름이다. 하지만, 산과 들에 풀이 무섭게 자라나고, 제초작업으로 바쁜 시기가 포르투갈 알가브에서는 겨울철이다. 그런 점에서 알가브의 겨울은 한국의 여름과 같다는 뜻이다.
(알가브의 계절에 관한 이야기는 예전에 간단히 정리해 두었다.)
https://brunch.co.kr/@algarve/28
지중해성 기후를 띤 알가브는 우기와 건기의 구분이 명확하다. 한국은 여름철에 고온다습한 반면 알가브는 여름에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7-8월에는 하늘에 구름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조차도 기억에 가물거릴 정도다. 두세 달 정도는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서, 알가브의 여름은 초록으로 무성한 한국의 여름과 달리 식물들이 바짝 마른 채 한국의 겨울처럼 죽은 듯이 견뎌내고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하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겨울이면 이야기가 다르다. 한국에서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마른 잎이 되어 무심한 발길에 밟힐 때쯤이면, 알가브 지방에서는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따사로운 겨울의 오렌지 태양아래에서 몸집을 키운 동그란 오렌지들이 침샘을 자극한다.
낭만은 딱 여기까지.
풀이란 놈도 살아갈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을 아는 듯하다. 여름 내내 황무지 같았던 가든 아래쪽 언덕배기에 겨울이 되면서 파랗게 새싹이 올라온다. 참 예쁘다. 질긴 생명력으로 물 한 방울 없이 몇 달을 견뎌낸 새싹들을 반가워하며 칭송했던 감성이 무색하게 잠시 눈을 돌렸다가 돌아보면 벌써 저만큼 자라나 있다. "저렇게 자라기 전에 한 번 정리를 했어야 했는데..."라는 나의 게으름을 탓하게 만든다. 저 나쁜 풀들이.
늦었지만 어찌해볼까 싶어서 제초기로 풀에게 시비를 걸어 본다. "야 이거는 답이 없다." 나는 게으르기도 하고 동시에 '효율적이다 또는 합리적이다'라는 명분으로 포기도 잘한다. 그런 덕분인지 사는 게 늘 편했다.
나의 게으름을 친환경이라는 이름으로 치환하여 무성한 풀들을 방치하고 적당히 편안하게 타협을 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포르투갈의 건조한 여름 기후는 산불에 취약하다. 몇 개월째 바짝 말라있는 풀숲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단단히 약이 올라 있는데 작은 불씨라도 하나 떨어지면 산봉우리 몇 개쯤은 쉽게 태워버린다. 물론 주택과 마을이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산불 예방과 피해를 막기 위해서 포르투갈법에는 집 주변 몇 미터까지 제초작업을 하지 않으면 상당한 벌금을 물린다. 그래서 "나는 친환경이다.", "나는 자연친화적인 삶을 추구한다"라며 마냥 풀을 내버려 둘 수도 없다.
마을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경계도 없이 펼쳐져 있던 들판과 언덕에 울타리나 담장이 생기면 안다. "아 누군가 버려진 땅을 새로 샀구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기 영역 표시에 필사적이다. 나도 똑같다. 심지어 집 울타리 안에 있는 한 덩어리의 땅도 나누고 구획한다.
마음 같아서는 땅도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반듯하게 딱딱 잘라서 떼어내고 싶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겨우 하는 짓이 작은 담을 쌓거나, 블록으로 바닥을 깔아서 주거 공간을 구획한다. 그 공간은 심리적으로 실제적으로 엄격한 통제와 방어가 이루어진다. 야생 동물 안됨. 벌레 안됨. 잡초 안됨. 그래서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뿌리고 쓸고 닦는다고 야단이다.
소위 문명화된 인간으로 잘 훈련된 나는, 호들갑 떨며 설정된 주거 공간의 영역 밖에서 까지도 구분하고 구획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돌을 주어다가 동그랗게 놓고서는 여기는 화단이라고 땅을 구분하고, 돌을 주어다가 길게 늘어놓고 여기는 길이라고 땅을 구획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똑같은 땅에다 돌을 몇 개 가져다 놓고는 그 걸 길이라고, 길에는 풀이 없다고 그래서 풀을 없애고, 또 편평하게 깎고 다져서 정리한다고 야단법석을 떤다. 결국에는 맨땅을 만든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구분과 구획들을 보고 좋다고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볼 때마다 늦게 깨닫는다. 그래 나는 아직 멀었다.
나는 두렵다. 인식의 한계와 편협한 정보와 좁디좁은 관점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이 되는 내가, 오로지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고, 나의 생각을 닫아서 가두고, 나와는 다른 생각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나는 겁이 난다. 내가 나눈 세상이 옳고, 나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 겁이 난다. 그래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소리에 귀를 막고, 내 주장만 악다구니를 쓰면서 억지를 부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겁이 난다. 심지어 내가 그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난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현명해지지는 않더라도,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참 한심한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한국의 상황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지켜보면 '한심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도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세상 잘난 그 사람들과 비교해서 훨씬 평범한 나는 걱정이다. 그 사람들보다 더 한심해지면 어쩌지?
대책 없이 무성한 잡초들과 싸우며 나의 생각과 인식을 점검하고 가다듬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