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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Feb 19. 2022

내가 지구를 처음으로 떠나던 날

[Cloud Mania]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스토리가 있는 구름 감상] 내가 지구를 처음 떠나던 날

https://youtu.be/cOjQ7CFzNQo

제목: 내가 지구를 떠나던 날, 촬영 장소: 포르투갈 알가브, 촬영 장비: 삼성 갤럭시 S9


서기 4000년에 발견될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


나는 서기 4000년에 지구에서 발견될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지구에서는 더 이상 꿈을 꾸지 못했다. 아니,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확인할 수 없는 무서운 어떤 것이 쫓아오고 나는 무작정 도망을 친다. 달리고 또 달려도 멀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나를 움켜쥐려 한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며 놀라서 일어난다. 한 숨을 몰아 쉬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는다. 꿈이었구나. 악몽에서 깨어 난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나를 쫓아오고, 아니 나를 쫓아 내려는 실체가 더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물을 마시려고 손을 뻗다 쌓여 있는 연체 고지서 뭉치를 잘 못 건드렸다. 비스킷 부스러기를 들고 행진하는 개미들 무리 위로 떨어졌다. 개미들은 놀라서 흩어졌다. 몇 놈은 작은 비스킷 부스러기 때문에 연체 고지서에 목숨을 잃었다. 나는 목숨을 던질만한 작은 비스킷 조각도 없다. 이 지구에서는.


엄마


지구를 떠나야겠다고 엄마에게 말을 했을 때, 가늘고 야윈 손을 억지로 들어서 무언가 말하려 했다. 늘 우리의 대화는 손짓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하지 못한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 가면 안 되겠니?" 또는, "다른 방법은 없니?" 정도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병상에 누워, 죽어지지 않는 자신의 질긴 생명을 원망하며, 항아리 속에 달려 있는 쿠마에의 무녀처럼 '죽고 싶다'를 속삭인 지가 오래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영원히 살기를 소망하지만, 불로(不老) 하지 않는 불사(不死)는 하늘의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살아 있지만 살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지구에 있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래도, 인사는 했다. 지구에서 나를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이니까.


지구를 떠나던 날


지구를 내가 처음으로 떠나던 날은 예상보다 아무런 감흥이 없이 덤덤했다. 내가 지구를 처음 떠나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동안 살아온 지구에서의 삶에 대해서 애착이나 아쉬움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도 또한 없었다. 흥분한 다른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내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주선의 창가로 작은 구름들이 떠가고 있다. 사람들이 죽고, 영혼들이 가야 할 그 어느 곳을 향해서 빨려 들어가듯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인간들이 생성한 유독 물질들로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했지만 지구의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예쁘다. '예쁘다'는 감정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낀다. 아, 나도 지구에서 태어났고, 지구인의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지. 앞으로 나는 어느 별에서 어떤 감정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까? 생각하기가 싫다. 분명한 것은, 창가를 스치는 구름들처럼 이름 없이 흔적 없이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ETF0QpWUjGuNrTQWtosxx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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