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덮인 건반의 운명
언젠가부터 막연하게 작곡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노래를 부르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난 뒤부터였던 것 같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음악과 관련된 삶을 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이 짧은 단락에서조차 막연하다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온 걸 보면 난 정말 아무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물처럼 흘러 디자이너가 되어버린 나는 이 일상을 거스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꽤나 큰 용기를 모아야 했다. 그러다 어느 여름,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날. 충동적으로 작곡 레슨을 하는 스튜디오를 찾아갔고 그날 바로 첫 달 레슨을 결제해버리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그때까지도 내 삶의 어떠한 결정들은 종종 그렇게 충동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다행히도 그 충동은 나름 적중률이 높아서 꽤나 성공하곤 했는데 작곡 역시 그 성공률 높은 선택들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했지만 이론을 알게 되고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알게 되자 노래를 금방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손 끝에서 비트와 멜로디가 피어났다. 이렇게 흐르고 흘러 음악을 업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될 만큼 작곡은 나에게 꽤나 잘 맞는 옷이었다.
하지만 한낱 직장인에게 자아실현은 너무나 비대한 꿈이었던 건지. 바빠진 삶 속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고 매일 시간을 내어 곡을 만드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일이 바빠지자 현실에서 가장 먼저 밀려나는 것은 꿈이었다. 영영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멈추고 나니 다시 시작하기가 처음 그 순간보다도 더 어려웠다.
여전히 노트북 배경화면에 작곡 폴더를 지우지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흘러 또다시 겨울이 되었다. 새로운 해의 도래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여전히, 꿈은 일상에서 밀려나 있었다. 침대 밑에서 뽀얗게 먼지에 덮인 건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나는 이년 후 서른을 어떤 직업과 함께 맞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전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매일 밤마다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조차도. 전부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