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낱장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서 Nov 25. 2020

과거를 걸었어. 몸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낱장 일기18

오늘 과거를 걸었어. 그때 타던 버스와 그때 내렸던 정류장, 환승했던 지하철을 타고, 몸이 먼저 기억하는 방향을 향해서 걸었어. 마치 4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더라. 그 친숙하고도 그리운 기분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 여기엔 카페가 있었는데. 붉은색 벽돌이 외관을 장식한 길쭉한 카페가. 향긋한 커피 향이 저녁을 채우고, 노오란 불빛이 각 층마다 창을 통해 새어 나오던 카페가 있었는데. 이젠 더 이상의 커피 향은 맡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 텅 비어버린 공간에서 아직도 난 과거 속의 나와 당신들을 봐.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던 우리를.

내 앞을 헉헉대며 뛰어가는 나도 보인다. 이쪽 방향으로 뛰어가는 걸 보면, 경제학 수업을 들으러 가던 거였겠지. 조금만 더 일찍 나오면 되는 거였는데 왜 그리 항상 뛰어다녔을까. 그 익숙한 파란색 백팩을 들썩이며. 그러고 보니 숨도는 아직 그대로네. 참 이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고작 몇 번밖에 가보지 못했어. 그보다는 맞은편 새하얀 항구를 떠오르게 하던 카페를 종종 갔었지. 내부도 널찍하고 무엇보다 음료들이 아주 맛있었거든. 지금은 문구점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야. 그리고 저 멀리 선배와 칼국수를 먹으러 가는 모습도 보이고, 교수님을 따라 골목 안 쪽 중국집으로 가는 모습도 보이네. 다들 아직 있을까. 다시 가보고 싶다.

학교 정문에 다 와가니 너무 많은 것들이 겹쳐 보인다. 정문에서 벚꽃 나무가 줄지어 선 언덕을 올라가는 나, 커브 앞을 지나가는 나, 편의점에서 나오는 나. 모두 나의 시간이었는데 이젠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차라리 신촌 방향으로 올 걸 그랬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럴 걸 그랬어. 거기에서도 과거의 나를 많이 찾을 수 있겠지만, 이쪽보다는 나았을 텐데. 지나간 시간이 너무 그리워서, 모든 시선에 추억이 걸려있어서, 그렇게 날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죄진 마음으로 체념하는 마음으로 걷게 되잖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헛되이 그리워하게 되잖아.

그래도 좋더라. 그냥 좋더라. 그리고 다음에는 좀 더 일찍 나오고 싶더라. 여유를 좀 두고, 잠시라도 좋으니 벤치에 앉아 가만히 눈도 감아보고, 숨도 천천히 내쉬어보고 싶더라. 그러면 그리움이든 후회든 슬픔이든 뭐든 실타래 풀 듯 숨결에 풀어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완결되지 못한 채, 매듭이 엉켜버린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이런 식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어. 금의환향을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 모습들을 내가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가슴에 사무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어. 지나간 시절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 그 시절의 내가, 이제는 손 닿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버렸다는 게 새삼 마음이 아리게 한다. 이상하게도 오늘 유독 그러네. 그리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만 같고. 그립다. 나의 지난날들아.     


1107

매거진의 이전글 때가 있더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