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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LAXY IN EUROPE Feb 06. 2024

커피 마셔도 잠만 잘 잤더라

카페인 조절이 필요한 나이

이곳 말라가에 와서 글을 쓰고자 하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지중해 바다로 모두 흘려보내버렸습니다. 영감이 이는 대부분의 순간들은 자연과 함께였던 탓이 큽니다. 구름 사이로 삐져나오는 일출에 감동을 받았던 첫날, 지중해 파도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겼던 요가 수련, 뜨거운 태양 빛에 선글라스로 맞서며 즐겼던 야외 테이블에서의 점심 식사, 그리고 나만을 향한 두 대의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었던 프로필 촬영까지의 이야기들은 제 마음속에서 천천히 숙성이 되는 대로 하나씩 풀어볼까 합니다.


나와 커피

오늘은 제 인생의 커피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커피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일상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음료인데요. 가장 오래된 커피에 대한 제 기억은 식탁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인스턴트커피와 그 옆에 나란히 놓인 프리마, 설탕 병입니다. 지금처럼 가정집에서도 커피믹스가 일반화되기 전이었죠. 엄마가 커피를 좋아하셔서 하루에도 몇 잔씩 드셨던 탓에 아주 어린 나이에 커피를 알게 되었는데요. 그땐 커피보다는 고소하고 달달한 '프리마'에 꽂혔더랬죠. 엄마가 커피를 타려고 물을 끓이고 있으면 커피 숟가락에 산을 쌓아서 프리마 한 숟가락을 털어 넣고 도망가곤 했습니다. 급히 털어 넣다 프리마 가루를 다 날리기 일쑤였죠.

1976년 동서식품에서 최초 출시된 커피 믹스

커피를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학교에 커피 자판기가 있었거든요. 야간자율학습 시간이면 어김없이 자판기 앞으로 달려가곤 했는데요. 저녁 도시락을 먹고 한참을 엎드려 자고 난 이후라 커피가 필요 없을 텐데도 매일 빠지지 않고 '밀크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맑은 정신에 이문열의 삼국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밤을 새워서 읽곤 했죠. (제 독서의 팔 할은 자판기 커피가...)

옛날 자판기 커피

지금의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들어오고, 인스턴트커피가 아닌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들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이 되고 나서입니다. 아쉽게도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를 처음 마셨던 기억은 나지 않아요. 시커먼 물을 무슨 맛으로 마시냐고 했던 어른들도 계셨던 것 같은데, 달콤하고 혀와 입에 착착 감기는 자판기 커피에 비하면 밍밍하고 쓰기만 한 물을 왜 마시는지 의아할 만도 했던 것 같습니다.


커피를 줄여야 한다고?

빠르게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에 적응한 이후 커피를 마시는 양은 점점 늘어갔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땐 식사 후 카페가 국룰이었고, 일을 할 때는 커피의 수혈을 받으며 밤새 일하곤 했지요. 밤을 새우기 위해서 커피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커피가 수면에 방해가 된다는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일하느라 또 노느라 수면은 늘 부족했고, 필요할 땐 눈을 감고 잠에 들 수 있었으니까요.

사진: Unsplash의 Kinga Howard

그렇게 20대, 30대를 커피와 함께 하다 보니 '커피 맛'에 대해 나만의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커피의 농도도 중요해졌습니다. 연한 커피보다는 진한 커피, 특히 우유가 많이 들어간 카페라테는 만족도가 떨어졌습니다. 믹스커피에 물을 많이 부은 '한강커피'를 마실 때와 같은, 커피를 마셔도 마신 것 같지 않은 "불쾌함"이 있었어요. 불쾌함이라는 표현이 좀 강한 감이 있지만, 아니 마신만 못한 커피를 마셔야 할 때는 기분이 썩 좋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에 드는 커피, 특히 진하지만 고소한 우유맛이 살아 있는 카페라테를 찾아 헤맸던 듯해요. 프랜차이즈 카페 중에는 폴바셋의 라테가 가장 만족감을 줬고, 어느 동네를 가든 내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아내고야 말았습니다.

고로커피 인스타그램(@gorocoffeeroasters)

그렇게 발견한 우리 동네 인생카페, "고로커피로스터스(https://www.instagram.com/gorocoffeeroasters)" 모든 커피가 (디저트 또한) 맛있지만, 저의 최애는 '대공원 플랫화이트'인데요. 흔히 볼 수 없는 적절한 산미의 대공원 블렌드에 제 입맛에 딱 맞는 커피의 진하기에 반해버렸습니다. 고로커피는 지금 위치로 옮기기 전에 알게 되었는데요. 지인의 결혼식에서 심하게 발목을 접질린 후 찾아간 정형외과 근처에서 맛있는 카페를 찾다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면, 발목을 접질리지 않았다면, 하필 그 정형외과를 가지 않았다면 숨은 보석 같은 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그리고 수년동안 거의 매일 출근도장을 찍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지각을 하더라도 오픈 시간에 맞춰 커피를 테이크아웃했고(강남에 있는 회사 출근 시간이 10시인데 봉천동에 있는 고로커피 오픈 시간이 10시였어요.), 지금 위치(서울대입구역 8번 출구에서 10분 거리)로 옮기고 나서, 재택근무를 하게 된 뒤로는 거의 매일 오전 11시에 오픈런을 했습니다. 잘 몰랐던 커피 원두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고, 다양한 지역의 스페셜티 커피들을 맛볼 수 있었는데요. 커피는 좋은 향과 쓴 맛이 나고, 거기에 우유, 크림을 넣어 마신다고만 생각했던 제게는 신세계였습니다. 딸기, 오렌지, 포도 등 과일향이 나는 커피, 오크향의 위스키 같은 커피, 처음 혀끝에 닿는 맛이 음미할수록 입안에 퍼지는 맛은 달랐던 커피 등 신선한 경험의 연속이었죠. 이와 어울리는, 달지만 달지 않아(한국인이 디저트에 하는 최고의 칭찬이죠.) 맛있는 디저트들과의 페어링으로 매번 갈 때마다 행복했습니다.


항상 웃음으로 맞아주시는 두 분 사장님과 바리스타분들 덕분에 마음 편히 커피와 카페 공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커피 맛을 더욱 좋게 만들어줬는데요. 지금은 멀리 이사를 하면서 몸은 멀어졌지만, 제 인생카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카페인 조절이 필요한 나이

수면과 상관없이 커피를 하루에도 몇 잔씩 즐기던 제게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잠을 설치기 시작했어요. 보통 30분~1시간씩은 시간이 걸려 잠이 들었지만 아침까지 푹 잤었는데 서너 번씩 잠을 깨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다시 잠들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곤 했지요. 흔히 개꿈이라 부르는 요란하고 의미 없는 꿈도 늘어만 갔습니다.

사진: Unsplash의 Alexandra Gorn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카페인이 체내에서 배출되는데 보통 8~12시간이 걸리고, 카페인이 가지는 각성효과 때문에 수면 부족이 오기 쉽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았습니다. 적어도 수면 시간으로부터 10시간 전에 커피를 마셔야 한다는 거예요. 보통 커피가 당기는 시간은 나른한 오후인데 말이죠. 하지만 늦게 커피를 마셨다가 하룻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후에는 즐거운 오후 커피타임을 없애고, 대신 상큼한 콤부차를 대신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유럽에 있는 동안은 커피를 끊어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절제 중인데요. 몇 번의 실패가 있긴 했지만, 1월 11일부터 26일 동안 총 5잔의 커피를 마셨습니다. 매일 1잔 또는 2잔까지도 마시던 저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요? 가장 큰 성공요인은 "유럽커피가 제 입맛에 맞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마음도 먹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유럽에 올 때마다 제 짐가방의 1/4은 고로커피로스터스의 원두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도 맛있는 커피를 마시겠다는 저의 의지였죠. 가끔 달달함이 당길 때 필수품인 믹스커피도 몇 개 챙겨 왔더랬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모든 것을 끊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잠은 아주 잘 자고 있습니다. 밤 10~12시 사이에 자고, 알람 없이도 아침 7시 정도에 기상합니다. 가뿐하게 해변에서 요가를 하고 점심을 먹는데요. 오후에 조금 나른해지만 30분~1시간 정도 눈을 붙여요. 그리고 저녁준비를 하고, 맛있게 먹은 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다 다시 잠이 듭니다. 물론 순간의 유혹에 못 이겨 커피를 마신 날은 이 흐름이 깨어지지만, 여유로운 생활 패턴 덕분에 잠을 조금 설쳐도 많이 부담이 되진 않더라고요. 오늘 못 잔 잠은 내일 또 자면 되니까요. 어찌 생각해 보면 수면부족은 카페인의 섭취 때문이 아니라 여유롭지 못한 내 마음 때문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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