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20)
1.
사랑의 기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접근을 해볼 수 있을 것이나, 그런 사랑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명하다. 당신이 추구하는 사랑과 내가 추구하는 사랑의 형태가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당신이 탄압받을 때 나는 그에 대항할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랑의 형태를 존중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랑의 형태를 하나로 단정할 수 없는 가운데 내가 보지 않는 다른 곳을 목격한 이들의 시야를 탄압해버린다면, 사랑의 지도를 우리는 결코 완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이 사회 안에서 은밀하게 교차하는 시선을 일종의 은둔자로서 그려내었다면, 셀린 시아마의 <여인의 초상>은 그런 사회 자체를 영화 안으로 분리해 옮겨와 그려내었다. 비유하자면 창과 액자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캐롤>이 상점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창문을 통해 시선을 마주하는 두 여인의 이야기라면, <여인의 초상>은 회화의 안으로 바깥의 모습을 들여놓는 것이니 말이다. 쉽게 말해 <캐롤>에서 도드라지는 게 공간의 분리를 통한 시선의 마주함인 반면에, <여인의 초상>에서 도드라지는 건 하나의 공간 안에서도 자체적으로 분리되는 시선의 거리감이다.
물론 <캐롤>과 <여인의 초상>은 퀴어영화라는 특정한 소재 말고는 동일선에서 비교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랑의 어떤 형태를 다른 시점에서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 비교는 필요하다. 여기서 혹자는 외부시선을 배제해 그들만의 낙원을 만드는 게 과연 퀴어영화로서의 어떠한 가치를 갖는 요인이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퀴어라는 게 소수자라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낙원은 유대를 위한 요인이면서도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는 점을 피해 갈 수 없다고 말이다.
다시 <여인의 초상>으로 돌아가 보면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와 엘로이즈(아델 에넬)가 사랑에 빠지는 공간을 언급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을 그리려고 어느 외딴 섬에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과정은 마리안느가 영화를 보는 우리의 이입대상이 된다는 점을 말해주는데, 영화와 사랑에 빠지려고 극장에 찾아온 관객의 모습과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다음으로는 자연스레 회화라는 매체에 대해 언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회화-사진-영화의 매체 발전 순서에서 회화라는 매체가 갖는 특이성 : 표면적 질감,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사진의 객관성과는 달리 존재하는 생동하는 것으로의 그 무표정에 관해서다.
2.
일반적으로 타오르는 불은 분노라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되곤 하지만, 뜨겁게 타오르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기전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 사랑하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의미를 확장해보면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쥐여준 것은 최초의 따스함, 그 사랑에 관한 언설이었다. 그리고 그런 불을 들고 동굴에 들어간 인류가 동굴에 벽화를 그렸을 때, 그것은 횃불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통해 생동하는 것으로의 생물, 제의, 감정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인류가 동물과 구분되기 시작한 지점은 바로 자신의 사랑을 기록해두기 시작할 무렵이다.
우주에 대한 사랑이 곧 우주 질서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점을 말해둘 수 있겠지만, 회화라는 무표정에 대하여 먼저 말해보고 싶다. 사진의 존재론과는 다르게 회화의 존재론은 순간으로서의 가치를 갖지 않는다. 사진의 존재론이 기술의 힘을 빌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던 세계의 새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라면, 회화의 존재론은 대상을 바라보는 이의 사랑이 영원성에 대한 찬미로 바뀜에서 그 동력을 얻는다. 사진의 플래쉬가 시간에 대한 응축이라면 회화의 덧칠은 대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한 차분한 축조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공간은 제의적 성격을 가진다. 뜨거움이 몰려든 공간은 곧 동시대를 한 자리로 모아 어떠한 관념을 축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신전과 같은 신탁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나눔에 있어 사용되는 은은한 무드등과 같은 분위기 창출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논의를 다음으로 넘겨보고 싶은데,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말할 때는 보통 사진이 아니라 회화의 성격을 주로 지칭하게 된다. 당신을 마음속에 그린다는 것은 곧 내가 바라보았던 당신의 모습을 회화로 만들어본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바라보는 영화는 늘 우리에게로 주어지는 물질적 요인으로서 스크린의 그것과 마음속의 요인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다르게 볼 수 없다. 사진에서 창출되는 기호만을 다르게 받아들일 뿐이다. 즉 이는 기호의 다층성에 의한 것이지 사진 자체가 어떠한 다양성을 품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회화는 사진과 달리 공간의 다층성으로 관찰자를 끌어들임으로써 내면세계로의 초대에 기호를 전력으로 투구한다. 따라서 사진의 그리움과 회화의 그리움은 그 성격이 다르다. 사진이 현실의 잘린 절편에 해당한다면 회화는 현실의 다른 굴절에 해당한다. 사진을 보며 얻는 그리움이 마음에 내리꽂히는 파편에 의한 상처라면 회화를 보며 얻는 그리움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회환으로써의 감정이다.
3.
영화를 분류하는 회화와 사진이라는 두 개의 기준이 있다면 우리가 그들에 보내는 사랑 또한 그런 두 갈래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리고 영화라는 틀에 부여하는 기준 또한 회화의 액자와 사진의 테두리로 나뉜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캐롤>이 사진의 원리로 작동하는 사랑이라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회화의 원리로 작동하는 사랑이다. <캐롤>에서 사진에 찍힌 대상을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은 사랑스러운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그런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는 이쪽에서 그곳을 바라본다는 ‘나’라는 의식, 데카트르적 코기토가 지배하던 우리내의 전통적 세계에 기반한다.
히치콕의 <이창>이 영화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바라보는 것 중, 관음증의 주제를 설명하는 것에 주로 인용되고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주체 개념이 곧 현대 이전의 인간 주체 개념과 동일하다는 점은 비교적 간과되어 왔다. 창 안에 누워 창 밖을 일방적으로 관찰하는 주인공처럼 우리는 세계를 일방적으로 바라만 보는 존재였다. 예컨대 이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왜 영화를 설명함에 있어 중요한 것으로 언급되었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은 우리의 응시가 닿는 지점을 현실로부터 분리해 별개의 현상으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였고, 그것을 사랑의 의미작용이라고 가정할 때 ‘바라본다’는 <캐롤>은 사진에도 뒷면이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말해주었던 셈이다.
허나 그렇다면 회화적 사랑은 그러한 발달사에 어긋나는 것일까.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우리는 사진이 가능케 한 게 주체와 대상의 분리라는 점을 명심해둘 필요가 있다. 사랑함에 있어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면 사랑의 동선이 확고해질지언정 결국에는 영화라는 대상을 사랑하게만 될 뿐이다. 이는 영화의 출발이 영화라는 대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종국에는 그것이 되려 영화에 대한 사랑을 저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체제에서 영화라는 틀을 사진의 테두리에서 회화의 액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캐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도드라지는 가장 큰 차이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응시가 상대를 기록한 매체의 성질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캐롤>에서 사진의 뒷면을 바라보는 행위는 상대를 뒤돌아보는 시선과 결합하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회화를 몰래 그리는 행위는 상대를 몰래 훔쳐보는 시선과 결부된다. 그러나 <캐롤>은 뒤를 돌아보는 것만큼이나 그리움의 감정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반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본다는 감정을 통해 공간 전체를 구축한다는 점이 매체적인 차이로 지목된다.
4.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도입부는 그림을 그리려 바다를 건너오는 마리안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섬에 사실상 유폐된 엘로이즈가 자신이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기다리며 하루를 지새우는 중이다. 이러한 도입부는 마치 동화의 도입부처럼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 찾아왔다가 다시금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필멸적 관계의 종언을 미리 예언해두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영화 속의 시대에서 주로 사용되는 회화라는 매체가 정략결혼을 위한 도구, 일종의 사랑에 대한 증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관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사진이 인간의 영혼을 수집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사진을 찍으면 영혼에 영향이 간다고 믿었으며, 비슷하지만 다른 이유로 사진을 찍는다는 건 그만한 엄숙함이 요구되는 행위였(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는 사진이라는 게 그만큼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간의 분출행위였다는 점이 큰 이유로 작용한다.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듯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하나의 모델을 같은 자세로 여러 날에 걸쳐 마주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는 방 안에 화가와 모델이 한 자리에 있어야 하기에 인물 간의 정신적 유대가 필요했고,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러한 유대가 없을 때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굉장히 어색해지거나 이상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대가 없을 때 어색하거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림을 그리는 일, 회화의 제작과정에 관한 단설을 영화를 기리는 우리의 방식에 적용하면 어딘지 모를 결론이 도출되는 것 같다. 우리가 영화를 바라볼 때 그것을 사진으로 여기는지 회화로 여기는지에 따라 어쩌면 사랑의 방식이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영화와 같은 공간에 자리하지 않는 우리가 영화를 통해 자기만의 회화를 완성할 때 과연 그것이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일, 혹은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분명 화가와 모델의 유대가 없을 때 초상화라는 회화의 한 장르는 어색하거나 이상한 일이 되어버릴 테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일이 재현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의 주된 조건은 엘로이즈가 자신의 초상을 그리는 것을 몰라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는 걸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작중에서 언급된다. 그래서 처음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을 흘깃흘깃 훔쳐보면서 신체의 부분을 먼저 그린 후에 그것을 차후에 모아 완성본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그려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주체를 파편화하는 작업에서 주체에 대한 감정이 온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더 나아가서는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자의적으로 굴절되는 현실의 여러 분포가 영화를 대하는 우리의 시선 문제를 시사하기도 한다.
5.
<이창>이 창 전체를 통해 바깥을 묘사함으로써 영화라는 게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면, 신체의 부분을 모아 전체를 완성하는 작업이란 무엇일지를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창>에서 보여준 영화의 사진적 힘이 플래쉬를 통한 시간의 응축인 반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보여주는 회화의 힘이란 덧칠을 통한 공간의 축조라고 앞서 말한 바 있는데, 바꾸어 말하면 그런 공간의 축조가 곧 타오르는 감정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사랑이라는 제의에 대한 영화적 구성물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는 단번에 인지하는 게 불가능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아주 거대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을 여러 번에 걸쳐 나누어 받아들인다. 여기서 신의 존재를 믿는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쟁점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는 신에 대한 믿음이 영화에 대한 헌신적인 믿음, 그런 사랑에 대한 자기확신의 요인으로 해석될 여지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모습이 마치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처럼 보인다. 다르게 보면 동성애라는 성향을 몰랐던 이들이 동성애 성향을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것은 사랑이라는 거대한 초상화에 다가가는 프리즘적 시선을 영화의 방식으로 묘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영화 제목의 문구가 단순한 은유로만 사용되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여인의 초상은 벽난로에 들어가 땔감으로 소모된다. 즉 정말로 타오른다. 그런데 이후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시선은 점진적으로 사랑스러워진다. 여기서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논의는 둘 중 어디로부터 그러한 변형이 시작되었는지가 아니라 불이라는 요소가 신전을 둘러싼 불, 그런 제의적 요인을 구성하는 보조장치보다는 사진을 찍을 때 터트리는 플래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진을 찍는 순간에 이곳으로 찾아온 마리안느의 시간은 물질 매체의 저편으로 떠나가고, 동시에 공간은 앞으로 나가면서 시간이 물러간 자리를 채운다. 끝내 엘로이즈의 모습을 한 하얀 유령은 과거의 카메라를 구성하던 유리막, 거울이라는 요인으로 등장하며 광학적 매체로서의 상호작용을 물질 매체의 저편, 유령이라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여기서 다소 흥미롭게 느껴지는 사안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가 사진의 발전이 아니라 회화의 재구성에 가까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이라는 점의 응집은 대상을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만 반대로 그렇게 분리된 조직으로 공간 전체를 점유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마치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점의 형태로 알아가면서 종국에는 자신이 알고 있던 대상으로서의 모습을 사랑의 형태로 재매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시간에 대한 응축을 기반으로 시간의 사건성을 따져 묻던 사진의 원리가 지배하는 영화라는 세상이, 공간을 축조하는 프리즘적 파편이 한 폭의 캔버스에 차분히 그려져 가며, 끝내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완성시키는 마리안느의 모습이, 영화를 바라보는 아니 사랑하는 우리의 태도처럼 보인다는 점이 <캐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간에 존재하는 미묘한 차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