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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Feb 20. 2024

비평은 어디에서 독립하는가


세계는 더 이상 계속해서 다시 가야 하는 도정 같은 것도, 끝없는 경주나 끊임없이 재개해야 하는 도전 같은 것도 아니며, 절망적으로 쌓아올린 것들을 위한 유일한 구실 같은 것도, 정복을 위한 환영 같은 것도 아니다. 세계는 하나의 의미를 되찾는 일, 지상의 글쓰기에 대한 지각이자, 우리가 그 저자임을 잊어버린 어떤 지리학에 대한 지각 같은 것이다.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인디스페이스에서 주관한 기획 ‘무명의 비평가들’을 소개하는 짧은 글을 읽었다. 대담의 형태로 작성된 이 글은 크게 관객, 비평가, 독립영화라는 세 개의 핵심어를 갖고서 진행되는데 흥미로운 건 문장의 논리가 아니라 배치다. 주관단체가 인디스페이스라는 점에서 독립영화를 언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대담에서 ‘비평’은 곁가지로 남거나, 혹은 ‘독립’과 ‘관객’을 이어주는 접착제처럼 사용된다. “독립영화는 무엇으로부터 독립하는가?”라는 화두가 던져진 상황에서는 이들에 앞서나갈 신체가 필요한데, 여기서 비평이 바로 그러한 행위성을 담보할 신체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나쁘게 말해 비평에 대한 질문의식이 없어 보이는 이런 사용법은 설사 그게 남용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건 아니라는 점에서 오용이라고는 볼 수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비평은 사실 딱히 사전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행위나 실천으로만 바라보아질 뿐, 어떠한 인식에 앞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런 아프리오리를 언어로 정제하려는 시도 자체는 항상 ‘지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뒤늦은 포용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폴 비릴리오는 지각을 두고서 병참학에 빗대어, 군사학에서 중요한 건 속도전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언급은 무언가를 느끼는 것과 적절한 시기를 사로잡지 못하는 두 개 뜻에서의 ‘지각’을 겹쳐보게 한다. 이 경우 신체에서 지각의 문제란 결국 아프리오리에 포섭되지 않는 실천, ‘에티카’를 가리키는 게 된다. 실천은 무언가에 대한 인식에 앞서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이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실천을 소명하는 일은 모두 벌어진 일에 대한 사후 조치에 불과하다. 영화는 이미 발생한 것을 보여줄 뿐 새로이 생성되고 있지 않으며 말하자면 여기서 표면은 사로잡는 게 아니라 촉발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에서 선제성은 있을 수 없거나 듣기에 이상한 표현이 되고야 만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가?” 비평은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면서,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반변증법의 형태를 취한다. 비평의 문제의식은 신체와 의식이 분리됨에 따라 이미 나아간 것을 따라가야 하는 일에 관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스스로에 뒤처지는 이런 상황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사로잡으려는 시도로 이어지며 비평의 관점을 직관에 더 가깝게 만든다. 


바꾸어 말하자면, 비평가의 행위성은 자신이 이미 그곳에 있다는 점으로 인해 예측이 아닌 예지의 노선을 따르는데 이러한 점으로 인해 비평가의 몸짓은 강건하고 굳건해진다. ‘이곳’과 ‘저곳’의 간극으로 작업하는 것, 그러나 이러한 간극이 파국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잔존하는 생명으로 사유되는 것.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바꿀 수 없다고 보는 유물론의 입장이 아니라 신이 아닌 인간은 세계에 편재할 수 없다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따른 것일 뿐이다. 오늘날 접속은 동시다발적이지만 이해는 포괄적이다. 모두는 자기를 가지고서 정체성을 작업하지만, 이러한 정체성 또한 자신이 갖는 면들에 대한 자기에의 이해일 뿐이라는 점에서 포괄적이다. 누군가 타인이나 대상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 그건 그저 자신을 따른 것일 뿐이다. 결국 이 [세계]에는 ‘자기’를 제외한 아무런 것도 없다. ‘자기’의 바깥은 [세계]를 사로잡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가 바깥을 사로잡는다. 존재할리 없는 외부를 찾아 헤매는 이 여정은 이어진 바 없는 신호 세기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마치 환상통을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그 치유법은 우리에게 그게 부재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 더욱더 하나된 자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부재를 발견하는 일은 자기가 실제로 느끼는 것들이 신체 표면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부재가 지각을 앞서 가는 일이 감각의 순행이라는 점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이 세계에 내쳐졌고 여기에 세계를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이데거의 생각이기도 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이기도 하다. 관객이 영화를 볼 때 우리는 그 모든 영화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슬퍼하면서, 이곳엔 결국 숱한 ‘자기’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탄식한다. 비평의 이러한 속성은 특히 우리가 소속되지 않은 것을 바라볼 때 극대화되는데, 가령 영화의 경우 유령들을 마주한다는 감정이 그렇다. 영화는 세계의 표면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만, 시선이 안으로 투영되는 것에 반해 신체가 그 안에 자리할 수 없기에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얼굴과 같은 하나의 표면으로 세계를 응집한다면, 영화를 보는 상황에서 우리는 영화가 드러내는 부재의 신호들에 빨려 들어가는 경험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비평의 경험이 어떠한 부재에서 출발한다면 영화의 표면이 편재성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중초점에서도 우리가 발견했듯이 카메라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세계를 평면화하므로 영화가 그 안에서 촉발된다는 말은 우리가 영화를 ‘부여잡는다’라는 것이 영화에의 끌어당김에 저항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어빙 고프먼의 말처럼 “우리의 자아 감각은 그 끌어당김에 저항하는 작은 방식들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체를 앞서 보낼 수밖에 없고 뒤따를 수밖에 없다. 신체는 세계와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자기’ 또한 빚어낸다. 결과적으로 부재가 곧 인식의 근거가 되는 상황에서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과는 달리 세계를 끌어안는 일은 다소 힘들다. 왜냐하면 내가 되라고 하는 것들이 나를 만드는 것에 반해, 나를 밀어내는 것들은 정작 나를 형상화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결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외부로 보면 신문의 사회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그렇다. 오늘날 인식은 현존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감각들을 인지하고 또 받아들이기에 많은 경우 부재에 대한 부채감으로 이어지곤 한다. 모든 현장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그곳에 자신이 부재했다는 사실로 인해 획득되는 부채감은 우리가 영화에 보내는 시선에 다름없다. 


영화를 본다는 건 어느 오래된 이야기를 집어들거나 낯선 세계로 방문하는 일이기 전에, 부재의 형상에서 자신이 설 자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부재란 자신이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애초에 자기의 바깥에 있어서 자기를 더는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인식의 걸림돌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재를 찾아 헤매기보다 부재를 만들어야만 한다. 모든 것은 부재하고, 그런 부재의 바깥에 주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딘가로 나아가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좌표를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압력차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형태로, 혹은 대상에 다가서서 끌어당겨지는 형태가 되어야만 한다. 신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 비평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점에서 행위자의 수행성을 담보로 한다. 영화를 두고 나뉘는 것들은 글의 말미에 언급되었듯이 “자신이 공동체에 어떤 형태로든 연루되어있다는 감각”으로 작업한다. 가령 시네필의 정의는 삶의 어떤 단계라기보다 자신이 말과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배후에 공동체를 두고 있음을 의식하는 사림이다. 시네필은 단순히 영화를 보며 생각한 것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서 이들 영화를 수행하고자 한다. 이들은 영화를 보며 환상 속에 사는 게 아니라 그런 환상을 자신이 수복해야 할 거울상으로 인식한다. 


독립영화의 문제를 비평과 같은 맥락에 두는 건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독립영화가 부재에서 자신을 찾고 있어서일 테다. 시네필은 무언가를 찾으려 하고, 끌어안으려 하며, 부재에 남는 사람이다. 시네필을 두고서 무언가 이론이나 연구의 면모로 접근하려 한다고 보는 일은 엄밀히 말해서 실천하는 방식의 문제일 뿐, 비평과 딱 잘라 구분되지는 않는 것 같다. 우선 비평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으나, 기본적으로 나는 비평과 연구를 다음처럼 나누어 바라보고 있다. 비평가는 비평을 통해 자신을 바꾸려 노력한다. 이때 중요한 건 ‘자신’을 정의하는 일로서, 위의 대담에서도 언급되었듯 비평에 어떤 공동체를 상정하는 일은 이러한 ‘자신’을 어디까지로 바라볼 것인지에서 중요하다. 비평이 추구하는 것은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말하는 법, 잃어버린 자신으로써 영화를 바라보며 파악하는 일이다. 비평가는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 속에 살기보다 그런 환상에서 갈등과 고통을 느낀다. 비평가는 영화를 두고서 한때 자신이었던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가 자신에게서 부재한다는 사실을 주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평가는 항상 세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세계에 앞서 간다는 이 인식이 바로 고독함과 부재를 유발한다. 


비평과 독립이라는 말은 어딘가에서 홀로 떨어져나와 있다는 점에서 공감대를 얻지만, 그게 꼭 무언가에서 독립하는 것일 필요까진 없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마 자기애의 형상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비평은 자기가 살아가고 싶은 세계를 말한다는 점에서 많은 경우 환상 속에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러한 지각에 사로잡힌 게 아니라 그리워하는 입장일 뿐이다. 이들은 절단에서 회복되기 위해 그러한 회복을 절단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순응하라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바꾼다’라는 말에서 회복을 꾀하려는 움직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실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곳일 뿐이다. 그리고 삶이란, 그저 수단일 뿐 방식이 아니다. 연구의 능력이 자기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는 중인지를 탐구하는 것에 쓰인다면, 비평은 어떤 세계가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지를 탐구하는 행위다. 세계를 바꾸는 것만이 꼭 회복인 건 아니고, 마찬가지로 독립영화는 세계를 상대로 작업하지 않는다. 지각은 전적으로 신체가 인식에 뒤처지기에 그럴 뿐,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현실이 없다는 점으로 인해 부재의 증표는 [세계]라는 단어를 대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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