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오이 김을 만들어 보아요.
싱크대에 올려진 채반에 오이 두 쪽이 있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오이는 희한하게 바다에서 날듯한 해조류의 비릿하면서도 푸릇한 향이 났다. 그 향을 머금고 오이를 만져봤다. 제주도의 울퉁불퉁한 바위가 떠올랐다. 시원했다.
여름이 온 것일까. 나는 책장에서 오이 그리고 여름의 향이 묻어있는 책을 골라봤다. 손에 걸리는 책이 몇 권 있었다. 그중에서도 때가 많이 탄, 어디 물웅덩이에 한 번 빠졌다가 말린 듯 쭈글쭈글해진 낡은 책 한 권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애정하는 책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참 많은 계절이 지날 동안 어딜 가든 내 손에 붙잡고 읽던 책이었다. 어렴풋이 그 책을 서점에서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에 진물이 나지만 특별히 도망칠 곳이 없었던 스무 살. 원하던 대학에 붙었지만, 딱히 행복하지 않았던 나는 [상실의 시대]를 만났다. 어렴풋이 ‘시대’라는 단어에 위안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혼자지만, 이런 나가 모인 사회, 그 사회의 일정 기간, 시대. 이 시대의 우리는 상실한 무언가의 아픔을 통해 서로 묶일 수 있을까. 지금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스무 살 때 보았으니 얼마나 읽기 힘들었으면 이렇게 책이 불어나 더러워질 때까지 붙잡고 있었나. 그 시절의 내가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지만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음식이 맛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살아 있다는 증거 같은 거죠.”
주인공 와타나베는 뇌종양으로 임종을 앞둔 미도리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평상시에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질 않던 미도리의 아버지는 와타나베가 배고프다는 이유로 천연덕스럽게 종이봉투에 있던 오이를 꺼내 먹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먹겠다고 말한다. 이 장면이 꽤 인상적인데, 이제껏 딸인 미도리가 애원하듯 먹으라고 할 때는 눈길 하나 주지 않던 아버지였다. 역시 단순한 말 한마디보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우선일까. 와타나베는 아삭아삭하는 청량한 소리를 내며, 그의 병실에서 오이를 씹어 먹었다. 오이 두 개를 숨도 안 쉬고 송두리째 먹고 나서야, 차를 끓여 마시고는 허겁지겁 먹느라 가빠진 숨을 돌렸다. 그제야 그는 오이를 찾았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침대를 세우고, 과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오이에 김을 말아, 간장을 찍고, 이쑤시개를 꽂아서 그의 입에 대어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 거의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씹은 후에 삼켰다.”
“어떠세요? 맛있죠?”
“맛있어.”
그는 남김없이 오이를 먹었다. 그로부터 닷새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상실’되었고, 주인공은 그를 떠올리면서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느긋하게 하던 빨래를 서둘러 거둬들이고, 곧장 사람이 북적한 신주쿠에 가서 시끄러운 재즈바에 들어가 건성으로 만든 커피를 주문한다. 문법 상으로 틀리겠지만, 주문 ‘해버린다’ 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시대에선, 실체보다 더 생생한 아픔의 잔상과 끝나도 남아 있는 감정들이 나를 조종하려 드니 말이다.
실체보다 생생한 아픔의 잔상은 오감을 통해 감각적으로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극단적인 예로는 트라우마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 PTSD는 크게 폭력이나 전쟁, 재난을 경험한 후에 나타나는 증상으로 나뉜다. 상실의 시대에 사는 60년대의 주인공이 현재에 사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을 지나 디지털 시대로 들어온 우리들은 딱히 어디에, 또는 누구를 일방적으로만 탓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물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행복한 사회라고는 할 수 없지만, 편리한 사회에 살고는 있다. 하지만 왜? 왜 우리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이끌고 북적한 도시 속에 숨어 맛없는 커피만을 들이키고 상실한 무언가의 잔상을 끊임없이 지우려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물음표는 다시 물음표로 되돌아온다. 어떻게든 마침표로 정답을 내고 싶으나, 잉크가 없는 작가처럼 흰 종이에 아무것도 적질 못한다. 글쓴이는 어쩌다 보니 습작을 쓰다 결말 부분에서 망연자실했던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선생님. 제가 만든 주인공의 행동에 확신이 안 서요. 저는 어쩌면 좋나요.” 나는 스스로 말하면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꼭 마침표여야 하는 거니. 물음표로 끝나도 되는 거야. 우리가 사는 시대에선.”
시원했다. 그렇다고 스스로 가지고 있던 자괴감이 증발한 건 아니었지만, 그 뒤로 마침표를 찾아서, 더 맞는 행동, 더 맞는 말, 더 맞는 미래를 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거 같다. 완벽한 김밥일 필요 있는가. 주변에 김과 오이만 있다면 말이다. 아무런 편견과 과거와 대조 없이 내가 사는 시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만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병실에 우연히 있던 오이, 김, 그리고 간장만으로도 죽어가는 한 사람의 식욕을 돋운 와타나베처럼 말이다.
<오이 김 만들기>
재료: 무염 김, 오이, 간장, 이쑤시개
1. 무염 김을 손바닥 크기로 자른다.
2. 자르고 싶은 오이를 고른다.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이의 종류로는 백오이, 청오이, 가시오이가 있고,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니 선호도에 따라 선택하시면 된다. 백오이는 속에 수분이 가장 많고 셋 중에서 야들야들한 오이로, 쓴맛이 적은 장점이 있지만, 중앙에 무른 부분이 많아 식감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가시오이는 진녹색의 길쭉한 오이로, 청오이보다 색이 더 짙은 오이다. 싱그러운 향이 강한 것이 장점이지만, 이름 따라 가시돌기가 입안을 불편하게 찌를 수 있으니 주의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청오이는 백오이와 가시오이 중간 정도의 색을 띠고 있는데, 백오이보다는 쉽게 무리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향이 특별히 좋다거나 그런 장점은 없다.
3. 오이를 길쭉하게 검지 손가락 모양 정도로 자른다.
4. 무염 김 위에 오이를 올리고, 돌돌 말아 간장을 찍은 뒤 중앙에 이쑤시개를 꽂는다.
5. 기호에 따라 아보카도 슬라이스를 함께 넣고 말아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