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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13. 2021

할머니의 미라클 모닝

<할머니의 사계절>




할머니의 하루는 대중없이 시작된다. 어느 날은 한밤 중에 잠이 깨 2시 반부터 살림을 시작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빨래를 돌리느라 종일 밤을 새우는 날도 있다. 


퇴사를 하고 일주일간 할머니를 보러 시골집에 내려가 있었다. 시골집의 방은 여러 개지만 잠을 잘 수 있는 곳은 한 곳뿐이라 할머니와 일주일간 같은 방을 썼다. 할머니는 내가 그 예전 어린아이 때처럼 잠귀가 어두운 줄 아는 듯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살림을 정돈하고 앞마당에 나가 채소를 뽑아오고 나무도마에 경쾌하게 칼질을 했다. 


처음 하루 이틀은 내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생활 소음으로 잠을 깨는 게 피곤하고 조금은 억울하기까지 했다. 시골에 쉬러 내려왔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날 일인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할머니의 분주한 움직임에 일어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전기장판 전원을 끄고 전기코드를 뽑고 일어나 가장 큰 소음의 원인인 덜컹대는 미닫이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갔다. 청량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이 달아난다. 아침 해에서만 볼 수 있는 깨끗한 어린 빛이 마당에 내려앉아 있다. 나는 다시 방에서 필름 카메라와 핸드폰을 챙겨 나와 이리저리 아침의 풍경을 담는다. 


"할머니 몇 시에 일어났어?" 


할머니는 항상 몇 시에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일어나서 무엇을 했는지를 매일 비슷하게 읊었다. 


"언제 일어났는동. 일어나 갖고 성경 읽고, 새벽기도 하고, 양 쪽 다리 번갈아 백 번씩 운동하고 그랬지." 


어릴 적 새벽에 잠이 깨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들은 날이 있다.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어떤 확신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할머니의 기도는 신께 드리는 부탁이기도, 내 가족을 지키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의 속삭임을 들으며 다시 잠에 들었다. 간절한 기도대로 나는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내가 학교에서 시험 성적을 잘 받아오면 할머니는 본인이 기도한 대로 됐다며 고맙다, 잘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할머니의 새벽 기도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오로지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잘 되기만을 바라는 기도가. 


할머니는 며칠 전 내게 "니 요가하는 것 좀 가르쳐다오." 했다. 요가를 전문적으로 해 보겠다고 지도자 과정까지 들었지만 나는 할머니의 몸에 맞는 요가 동작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허리는 직각에 가깝게 굽었고, 먹어도 자꾸만 살이 빠져 몸이 가벼워진다는 할머니에게 무슨 동작을 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괜히 안 하던 동작을 해서 몸에 무리가 갈까 겁이 나기도 했다. "할머니 지금 하는 것처럼 하면 돼."라고 대답하고는 혼자 조금 슬퍼졌다. 다음번에는 할머니의 모닝 루틴에 새로운 활력이 될 요가 동작을 가르쳐 드려야지 하고 생각했다. 


오늘 할머니의 아침은 몇 시에 시작됐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큰 글자 성경을 읽으며 전보다 그 내용을 조금 더 이해했을 것이고, 온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속삭이듯 기도했을 것이다. 나는 몇 번씩이나 봐도 어디에 힘이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는 무릎 운동을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백 번씩 했을 것이고, 문지방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주방 일을 하고 앞마당을 가꿨을 것이다. 


벌써부터 할머니의 분주한 아침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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