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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14. 2021

할머니의 재봉틀

<할머니의 사계절> 




할머니는 한복을 만드는 분이셨다. 어릴 적 내 할머니의 직업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할 때면 하나같이 "와, 한복을 직접 만드셔?"라며 신기해하곤 했다. 그때에는 그게 왜 특별한지 잘 몰랐었는데. 지금에야 할머니의 굽은 등과 낡은 재봉틀이 새롭게 보인다. 


유치원에서 장기자랑을 하던 날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준 한복을 입었다. 내 몸이 금세 커버려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멋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저고리의 소맷부리에는 색동 천이 둘러져 있었다. 꽃과 나비가 수 놓인 다른 친구들의 기성 한복과 달리 조금은 투박하고 과감한 색상 조합이 돋보였지만 나는 그런 내 한복이 좋았다. 


할머니는 서른한 살 때부터 한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남편이었던 나의 할아버지는 결혼한 지 십 년도 안 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혼자가 된 할머니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어린 삼 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딴 거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데 내가 솜씨는 있었는 모양이래. 나는 보기만 해도 만들 수 있거든. 그래서 혼자서 생각해가지고 바느질을 했다. 나도 부모가 일찍이 돌아가시고 그랬으니까 그냥 가르쳐 준 사람도 없이 다른 사람 하는 것 보고 따라 했는데, 그렇게 내 바느질이 이쁘다고 모두 난리를 치고 그랬어." 


아빠와 고모들이 아직 국민학교에 가기 전 시작된 할머니의 바느질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계속되었다. 40년이 넘는 긴 시간이었다. 할머니는 반나절만에 치마를 만들어내고, 하루 꼬박 집중해 저고리를 만들어 냈다. 할머니가 그 일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잘할 수 있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몇 번이나 확인하며 일을 하는 우리 할머니의 한복에는 조금의 오차도 없었고, 다림질 몇 번으로 한복에서 아름다워야 할 부분을 충분히 돋보이게 만들었다. 


할머니가 고운 천을 가져와 작업을 시작할 때면 나는 옆에서 자투리 천으로 인형 옷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 솜씨가 뛰어난 할머니도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는 "아이고, 어예노"하며 만들다 만 한복을 샅샅이 눈으로 훑었다. 나는 덩달아 초조해져 마음속으로 큰 실수가 아니기를 빌었다. 

할머니가 만드는 한복 중 내가 싫어하는 종류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삼베옷이었다. 삼베에서 나는 특유의 강한 냄새 때문에도 그렇고 할머니가 "이거는 사람이 죽었을 때 입는 거다"라고 해서 괜히 마음이 심란해졌었다. 

가끔 할머니와 읍내에 있는 한복집에 같이 갔었다. 완성된 한복을 들고 가면 한복집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일 삯이 든 흰 봉투를 건넸다. 한복집 아주머니는 여러 기술자에게 한복을 맡기는데 특별히 할머니의 한복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나의 할머니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사실 할머니의 바느질은 50대에 끝날 수도 있었다. 나의 부모는 양육비를 주겠다고 약속하며 할머니에게 나를 맡겼다고 한다. 겨우 자식들을 다 키웠는데 다시 양육을 시작하게 된 할머니. 고모는 이제 힘든 바느질 그만 해도 되니 다행이지 않냐며 할머니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의 부모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할머니는 손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다시 재봉틀을 돌렸다. 내 키는 자라는데 할머니는 자꾸만 굽어갔다. 


할머니의 재봉틀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만 더 이상 굴러갈 일이 없다. 재봉틀의 날렵하고 단단한 회색 몸체는 연두색 비단 덮개로 차분히 덮여있고, 그 옆으로 난 작은 작업대에는 자질구레한 화장품 샘플, 혈압약봉지들이 놓여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밤샘 작업을 할 때 나도 그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를 하던 기억이 난다. 노란 장판에 엎드려 둔탁하고 힘 있는 미싱 소리를 들으며 문제집을 풀던 어린 내가 눈에 선하다. 나는 할머니 덕에 깊은 밤이 외롭지 않았는데, 할머니도 그랬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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