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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15. 2021

우리의 긴긴밤

<할머니의 사계절> 




어릴 적, 할머니가 늦은 밤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러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손녀에게 어디에 갔다가 몇 시까지 오겠다고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 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밥벌이가 무척 바쁘고 고단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그 흔한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밤늦게까지 소식이 없을 때는 달리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할머니와 소식이 끊겼을 뿐인데, 세상이 등을 돌린 느낌이었다.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은 한 시간에 한 번 버스가 다녔다. 읍내에서 우리 마을로 돌아오는 막차 출발 시간은 저녁 7시 30분. 15분 정도 되는 시골길을 달려 버스가 우리 마을에 정차하면 나는 조마조마하게 저 멀리 할머니의 실루엣이 있는지 찾았다. 버스에서 내린 몇 명의 무리에 나의 할머니가 없으면 그날은 불안한 기다림이 시작되는 날이다. 


막차를 타지 않은 할머니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는 '건너밭'이라고 부르는 산 아래 있는 밭이었다. 할머니를 따라 건너밭에 가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원체 길치였던 나는 깜깜한 밤에 산길을 제대로 찾아낼 자신이 었었다. 건너밭에 가려면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고, 쭉 뻗은 길을 따라 8분 정도 걸어가 오른쪽으로 난 작은 다리를 건너고, 낯선 이를 보면 짖는 개가 있는 집을 지나 '웍-욱-' 하는 산짐승 소리가 무성한 산길로 올라가야 한다. 어린 내게 그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할머니가 그곳에 있을까 싶었지만 차마 확인하러 가볼 수는 없었다. 


늦은 밤 할머니를 기다리는 일은 외롭고 무섭고 슬펐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밤이 길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TV의 예능 프로그램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혹시나 할머니가 잘못되었을까 엉엉 울다가도 11시에 시작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예능을 볼 때는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패널들의 웃음소리에 기대 내 안의 긍정 세포를 가동시켰다. 쉴 새 없이 말하고 웃고 떠드는 그 프로그램들이 더 늦게까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할머니가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외로움만큼이나 크게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할머니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어떤 확인도 조치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심이 빠르게 자랐다. 나 하나는 거뜬하게 책임질 수 있어야 했고, 얼른 자라서 할머니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없는 밤에 주로 나는 후회하고 성찰하고 다짐했다. 


할머니의 밤은 왜 그리 길었을까. 

끝내 손녀를 혼자 두지 않은 나의 할머니. 

그때 하지 못한 밤 인사를 건넨다.


"걱정했어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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