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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Oct 15. 2021

왕포도알과 검은 봉다리  

<할머니의 사계절> 




폴라포를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내가 즐겨먹던 20년 전에는 왕포도알이었는데. 입 주변이 보라색이 되는 입이 얼얼하게 시린 그 아이스크림을 보면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난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 같이 걸어 내려갔다. 피아노를 배우러 읍내로 나가야 하는 손녀를 정류장에서 배웅해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따라 유독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같이 슈퍼에 다녀왔다가는 자칫 한 시간 간격의 마을버스를 놓칠 수도 있는데도 할머니에게 아이스크림- 하며 징징 떼를 썼다. 손녀가 아쉬워하는 상황을 못 참는 할머니는 말없이 슈퍼를 향해 느린 걸음을 재촉했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멀어졌다. 입이 비죽 나온 나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 버스가 오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쭉 뻗은 이차선 도로의 끝에서 자주 타던 버스 색깔이 보였다. 버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달려왔다. 어린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할머니가 내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는데... 근데 이 버스 놓치면 학원 못 가는데...' 하는 순간 버스가 내 앞에 섰다. 하는 수없이 큰 보폭으로 계단을 올라 요금을 냈다. 그 순간이었다. 종종 달려오다시피 한 할머니가 "야야, 이거 갖고 가라"하며 버스 계단 아래서 왕포도알이 든 검은 봉지를 내밀었다. 와락 창피한 마음이 덮쳤다. 고마움이 아닌 창피함. 내 보호자가 할머니라는 사실, 할머니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사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서 떼를 썼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버스에는 몇 사람 없었지만 내 얼굴은 동그랗게 붉어졌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버스에 완전히 올라탔다.


그날 학원에 다녀온 내게 할머니는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나이 든 할마이가 가서 창피하나?” 

그 물음에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내 마음속 깊이 구겨둔 미안함을 알아차렸기를 바랄 뿐이다.


할머니를 부끄러워하던 꼬맹이는 할머니를 자주 그리워하는 어른이 되었다. 얼굴을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리워한다. 어린 날 검은 봉지 같던 마음 깊은 곳에서 애정과 존경을 꺼내보이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어린 시절처럼 할머니와 더위사냥을 나눠먹고 싶다. 반을 잘 갈라서 조금 더 크게 잘라진 쪽을 할머니 손에 쥐어드리고 싶다. 이제는 내가 할머니께 더 내어드려도 된다고, 안심하고 받으시라고 그렇게나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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