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봉성 할머니 댁에 다녀온 날. 여기 수원에서 출발해 한 시간 반 정도만 지나면 고속도로 사방으로 크고 높은 산들이 둘러싼다. 긴긴 터널을 지나고 몇 번 먹먹해지는 귀 때문에 침을 삼키다 보면 익숙한 길이 나온다. 시골을 떠나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그 길은 편안하고 반갑다.
오랜만에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점심을 먹었다. 고구마전과 계란찜, 액젓 맛이 강한 김치와 두 종류의 멸치볶음, 할머니는 평소에 즐기지 않는 고기볶음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했던 그 반찬들과의 정을 생각해서 배를 넉넉히 채우고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특히 반죽을 넉넉히 입힌 고구마전을 좋아하는데 오늘은 그 옆에 있는 간장 소스에 눈길이 갔다. 할머니의 간장 소스는 여느 것과 다르게 되직한 맛이 있다. 보통의 것처럼 맑고 가벼운 간장이 아니라 묵직한 짭짤한 맛을 주는 그 소스와 고구마전을 곁들이면 달고 짠맛이 배가 되는 느낌이다.
할머니는 먼저 식사를 했다며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큰고모가 얼마 전 할머니에게 '살면서 어느 때가 가장 행복했냐'고 물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고민 없이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대답했다고. 밥을 먹다 말고 속으로 놀라 할머니를 봤다.
"옛날에는 아 셋 키우느라고 정신없이 살고 내가 맨날 꼬부러져 가지고 일만 하고 그랬으니 덧정이 없지. 지금이야 내 몸만 조심하면 되고 일 좀 하고 벌어먹고 사니 편하잖나. 지금이 제일 좋다. 고생하던 거 생각하면 고마 덧정 없다."
다행이었다. 세월을 건너 할머니가 지금 행복하다니 참 다행이었다. 식은 고구마전을 씹으며 속으로는 덧정 없다는 말을 곱씹었다.
할머니는 말하면서 자주 웃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할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눈에 띄게 작아지고 굽어가는 것 같아 같이 있는데도 조바심이 났는데 오늘은 신기하게 할머니 얼굴이 좋아 보였다.
그덕인지 밥을 많이 먹었는데도 소화가 잘 됐다. 두 시간 반을 달려 다시 수원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앞에 앉아 '덧정 없다'라는 말이 있는 말인지 찾아봤다. '질색이다, 정떨어진다'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봉성 할머니들 말인 줄 알았는데 그보다 넓게 두루 쓰는 말이었다. 검색창에 '덧정'이라고 고쳐 넣었다. 덧정. 할머니의 세월을 설명하기에 꼭 맞는 단어였다. 다음번에 또 할머니를 보러 가면 그 덧정 없는 세월에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을 아무 쪽에서부터나 펼쳐 하나씩 들려 달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