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러닝 코스 2
2년 전 봄, 퇴사와 입사 사이에 짧게 시간이 나기도 했고 혼자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었다. 혼자 어디 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회사 다니면서는 가기 힘든 뉴욕에 가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뉴욕은 러너들의 도시라지 않은가! 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열흘 남짓의 여행이라 호텔보다는 현지 생활자의 느낌이 드는 아파트에 묵었다. 위치는 8번가 53-54st 사이. 센트럴 파크와 얼마나 가깝냐, 가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센트럴 파크까지 걸어서 5분 정도 거리라고 했는데 5분까진 아니고 천천히 걸으면 1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공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http://www.centralparknyc.org/
1) 가는 법: 입구가 많지만 나는 콜롬버스 서클로 가서 달렸다(아래 지도 별표시)
2) 러닝 팁: 콜롬버스 서클 - 서쪽길 -큰 호수 - 동쪽길 -다시 서클로 돌아오면 8km 정도. 내겐 거리부터 풍경까지 최적화된 코스였다. 강추!
특히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
- 뉴욕에 여행간 모든 사람
- 달리기를 하지 않더라도, 피크닉 매트 가져가서 잠깐 쉬다 오기에도, 산책하기에도 너무 너무 좋다.
장점
- 러너에게 최고의 공원이 아닐까
단점
- 딱히 없다.
1. 센트럴 파크의 아침. 5km만 가볍게 뛰기로 마음을 먹고 슬슬 달리기 시작. 중간 중간 달리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설렜다. 대부분 혼자 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역시 인생은 혼자, 달리기도 혼자, 여행도 혼자, 나도 혼자. 달리다 발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뉴요커들은 여기서 매일 러닝을 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달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달렸다. 센트럴 파크에서 아름답다는 길, The Mall도 달렸다(오른쪽 중간 사진. 가을엔 더 아름답겠지). 나의 센트럴 파크에 대한 첫 느낌은 마냥 아름답다였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크구나.
2. 전날 맥주를 마시고 잤더니 푹 잘 잤다. 역시 하루의 마지막은 맥주. 좋은 사람과 함께면 더 좋았겠지만 혼자 하는 여행도 더할 나위없이 좋다. 개랑 달리는 사람, 유모차 끌고 달리는 사람 등 러너들이 정말 많았다. 뉴욕은 정말 러너의 도시구나, 감탄.
3. 전날과 그 전날은 오전에 비가 와서 러닝을 못 하고, 이날 아침엔 센트럴 파크로 달리러 나갔다. 비가 온 다음이라 더 깨끗해진 날씨. 나무 사이로 축복같은 볕이 쏟아졌다. 센트럴 파크를 며칠 달려본 뒤에 나에게 꼭 맞는 루트를 찾았다. 콜롬비아 써클 쪽 공원 입구에서 왼쪽으로 달리다가 호수에서 돌아오는. 나에게 달리기 딱 좋은 루트. 뭐든지 해봐야 할 수 있다. 달려봐야 그 길이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있고 가봐야 그 도시가 또 오고 싶은 도시인지 아니지 알 수 있으며 만나봐야 나에게 맞는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경험칙이 쌓인다는 것. 경험과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
4. 도시의 녹색은 더욱 아름답구나. 나에게 좋은 사람이 누군가에겐 좋지 않은 사람일 수 있고, 나에게 맛있는 음식이 누군가에겐 맛 없는 음식일 수 있고. 섬세한 취향을 가지기 위해선 스펙트럼을 넓혀서 보고 듣고 만나고 마셔야 하는 것 같다. 들이는 시간 없이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 공짜는 없듯이.
5. 아무렇게나 입고 달린 날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쓰고 입은 날 달리는 기분이 확연히 다르다. 쫙 달라붙는 셔츠와 쇼츠, 쿠셔닝 좋은 운동화를 신고 자신감 있게 달리는 날은 내뱉는 숨마저 호기롭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푹, 알람도 못 듣고 잤다. 사실 어디서든 얕은 잠을 자는데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니 신기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개운하다고 느낀 게 얼마만이던가.초록초록한 뉴욕의 아침. 밝고,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큰 호수를 끼고 달리고 돌아왔다. 호수 물결처럼 반짝이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여기를 달리고 있는 내가, 나 자체로 빛나는 느낌. SATC나 프렌즈의 주인공들이 달리기 할 때 보였던, 그때 그 곳이로구나. 그 곳을 내가 달리고 있구나. 5부 팬츠를 입고 달렸더니 무릎 밑에만 타는 거 같아서 룰루레몬에서 산 숏팬츠 입고 가볍게 달렸다. 씩씩하게. 월화수목금 출근을 하고 토일 이런저런 일정들로 주말을 보내고 나면, 또 월화수목금이 돌아오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하고. 평일 시간은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다. 휴가가 아닌 이상. 그래서, 아침엔 달리고 점심엔 낮잠을 자고 밤에는 맥주를 마시는 별 거 없는 일상이 얼마나 귀한가를 지금의 나는 잘 안다.
6. 이날도일찍 일어나 조깅하러 나왔다. 조금 쌀쌀했다. 피부가 느끼는 감각. 달리기를 하면서 공기로 날씨로 계절을 느낀다. 룰루레몬에서 산 러닝용 물병. 손에 끼고 달리면 된다. 그립감이 좋음. (그러나 쓸모 없음) 혼자 하는 여행은 처음엔 두렵고 낯설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또 좋아진다. 역시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주나보다. 아침 일찍 새로운 길을 달린다는 것. 별 게 아닌데 참 욕심이 난다. 호수인데 바다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파랄 수 있을까. 눈부실 정도로 파래서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싶을 정도. 어려서 해안 쪽에 살았다보니 물을 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게 강이든 바다든 호수든. 잔잔한 물결이 주는 평화로움. 물결에 비치는 햇살, 반짝임 같은 것들. 맑지만 살짝 쌀쌀했던 날씨.
아무리 즐거웠던 여행이더라도 끝이 보이면 아쉽기 마련. 내가 여길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여기를 달리는 게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 를 생각하며 센트럴 파크를 달렸다. 5번가에 있는 나이키 타운에서 산 파란색 보메로와 룰루레몬에서 산 러닝 팬츠를 입고. 8km 달리니 딱 좋다. 달리다보면 알게 된다. 내가 얼만큼 달리면 다리가 뜨뜻해지는지, 노곤해지는지, 아픈지, 무리인지, 적절한지 아닌지. 뭐든지 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 떠나봐야 알 수 있듯이, 달려봐야 알 수 있다. 나의 페이스, 나의 거리, 나의 심박수, 나의 보폭 등.
7. 차곡차곡 달리다보니 떠날 날이 왔다. 마냥 달리고 있으면 시간은 나를 그 지점의 끝으로 데려다준다. 달리기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쓰는 운동이라 그 감각이 오래 오래 몸과 마음에 남는다.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어딘가에 남아있다 불현듯 떠오른다. 아마 내가 달리기에 취미가 없었더라면, 센트럴 파크를 유유히 산책하고 지나갔겠지. 이렇게 발바닥으로, 발바닥에 와닿는 느낌을 오래 기억할 줄도 모르고. 마지막 러닝을 하러, 떠나는 날 아침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뉴욕에 머무는 십여일 중 일곱번의 러닝을 했다. 일곱번의 센트럴 파크. 같은 계절이지만 비슷한 날씨였지만 일곱번의 느낌은 다 달랐다.
어떤 날은 마냥 피곤했고, 어떤 날은 마냥 귀찮았고, 어떤 날은 마냥 행복했으며, 어떤 날은 마냥 내 심장이, 내 다리가 움직이는 감각에 감사했다. 이 날은 왼쪽으로 시계 방향으로 돌았는데(다들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달리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대개 무표정인데 눈 마주치면 씩 웃는 사람들도 있었고. 달리기는 생각을 비우기에 가장 좋은 운동이다. 내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내 다리는 앞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내 머리는 내 생각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든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잿빛인 호수도 안녕.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미래는 단언하지 않는 것이 좋다. 꼭, 절대, 반드시 같은 것은 깨지기 마련. 개랑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공교롭게 개랑 주인이랑 다 닮아서 혼자 빵터져서 피식피식 웃었다. 언젠가, 다시 또 뉴욕에 오게 된다면 난 또 이렇게 차곡차곡 달려야지.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다시 못 올 사람처럼 1분 1초 가열차게. 달리기를 하고, 샤워를 하고, 짐을 싸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오로지 나를 위해 사용한 십여일의 시간에 대해 생각했었다. 우리 엄마 아빠의 딸, 동생의 누나, 누군가의 여자친구, 누군가의 동료, 친구, 동생인 나에 대해서. 서른이 되면 뭔가 엄청난 변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철없고 이십대 초반에 머무는 것 같은 나에 대해서. 앞으로 옮길 새로운 회사,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에 대해서. 낯선 곳도 낯선 사람도 모두 시간이 해결해줄 걸 아니까, 시간의 힘을 믿으니까, 나는 나니까, 나는 나대로.
살면서, 생각보다 혼자 여유롭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쪼개고 쪼개고 노력해야 생긴다는 걸 알아서. 내가 두고 두고 이 여행을 반추할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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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러닝 앱으로 한 기록들.
+ 사실 올해 가을 뉴욕 마라톤 나가고 싶어서, 홍보대사 신청했는데 최종에서 불합격. 돈 내고 엔트리만 사고 싶다. 여행 상품 말고. 딱 엔트리만.
+ 또 가고 싶은 도시가 있다는 것. 그렇게 어딘가에 아주 조금의 마음을 두고 사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