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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미정 Sep 16. 2019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표창장...

큰 아이가 처음 유치원을 들어갔을 때 이야기다. 이름도 생소한 Pre-K 4라는, 네 살 박이 아이들을 받아주는 동네 공립유치원이었다. 동네에서 정보라고는 0점이었던 엄마 탓에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한 달이나 늦게 들여보내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등원하는 날을 기다린다. 

새삼 내가 처음 학교 갔을 때 어땠지? 뭘 배웠었지?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등등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 보지만 무슨 소용인가? 시절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고 무엇보다 언어가 다른데... 행여나 친구들에게 뒤질세라 틈틈이 알파벳도 가르치고 yes, no 등도 성의껏 가르친다. 막상 학교에 가면 어떤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정말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드디어 등원 날이다. 노오란 학교버스는 왜 그리 크게 보이는지... 골목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학교버스를 보니 내가 벌써 제정신이 아니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아이가 궁금하여 이리저리 목을 길게 뺀 나를 보고 눈치빠른 버스 선생님은 걱정 말라고, 다 잘 할 거라고 토닥여 주신다. 


그리고 한 시간... 두시간... 시간은 왜 이리 안 가는 거야. 그 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활짝 웃으며 버스에서 내려오는 아이가 얼마나 반가운지. 그러나 아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엄마가 무얼 묻는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도 없다. 띄엄띄엄 대답하는 아이를 붙들고 홈즈처럼 추리해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첫날 학교에서 배운 건 


간식 먹기, 줄 서기, 정리정돈하기, 놀이터에서 놀기,... 

"뭘 정리했는데?" 

"그거 있쟎아, 크래프트 하고 나서 크래용 다시 제자리에 놓기..." 


여기서 내 목소리는 눈에 띄게 푹 꺼졌었겠지만 다행히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이 게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숙제가 생겼다! 


"뭐야 뭐야?"

그림이 가득한 종이를 두 장 꺼낸다. 두 개가 같은지 다른지, 다르면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찾아야 한단다. 그리고 그 부분을 색칠하는 거다. 


그렇게 첫 학기가 지나고 2학기의 중반에야 Phonics를 시작한다. 워낙 늦게 시작하는 데다 알파벳 하나마다 어찌나 공을 들이는지 28개밖에 안 되는 알파벳조차도 i쯤에선가 그 학년이 끝났던 것 같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 년 내내 가르치는 거라곤 오직 줄 서기, 정리정돈하기, 친구들하고 간식 먹기, 같은 것과 다른 것 찾기라니... 아이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데... 이래서는 아이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지, 이게 무슨 교육이야! 이러니 공교육을 못 믿는다 그러지!


그땐 그랬다. 보이는 것만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지식이 교육의 핵심이자 본질이라고 믿었다. 아니, 더 솔직이 말하면 지식이 교육의 전부라고 믿었다. 많이 알아야 하고, 핵심을 선명하게 짚어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자신감이 나온다 생각했다. 그래서 어릴 때 두각을 나타내는 '신동'이란 인류의 소중한 보배이며 그들의 지적 능력을 특별히 관리하지 않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무책임한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크나큰 사회적 손실이다. 줄 서기, 정리정돈하기, 간식 맛있게 먹기,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기 등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어딜 가나 정보, 정보, 정보가 넘쳐난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모두 정보화된다. 먹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먹고 안 먹는 것도 안 먹는 이유가 있어야 안 먹는다. 정작 배가 고픈지 부른지는 뒷전이다. 정보화되면 그럴 듯해 보이나 결국은 자기 욕심의 합리화 과정이다. 이성은 욕심을 통제하지 못한다. 욕심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뿐이다. 먹는 것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도 다이어트는 결국 내일부터이다.


두 아이를 키워놓고 보니 어릴 땐 맛있게 먹어야 하고 재미있게 놀아야 하고 노느라 피곤해서 곯아 떨어져 자야 한다. 뭔가 성에 차지 않고 부족한 듯 하면 갈증을 느끼게 되고, 갈증을 느끼기 시작하면 충분해져도 충분한 줄 모른다. 여기서 불안이 시작되고 한번 시작한 불안은 웬만해선 멈추지를 못한다. 그걸 알고 나니 이미 한참을 지나 버렸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늘 미안하다. 


지식이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채워지게 된다. 아둥바둥하지 않아도 채워질 건 채워지고 아둥바둥해도 안 채워질 건 안 채워진다. 우리 세대를 키워준 베이비 부머들이 당신들의 지식으로 우리를 키우셨겠는가? 

"내가 뭘 알겠노? 니가 알아서 해라." 

하시던, 자식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전폭적 지지가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이만큼 이끌어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엄마의 사랑이 가득한 간식을 먹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면서 자란 아이들은 원만하고 오롯한 힘이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나 서로 마음 툭 터놓는 친구들이 있으면 아이들은 어떤 상황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진정한 자신감이다. 자신감이란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을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런 힘이 있으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그냥 조금 더 노력하면 될 일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한참을 '보이는 것'에 매달려 온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성적, 눈에 보이는 스펙, 눈에 보이는 대학... 심지어 봉사활동조차도 좋은 대학을 위한 스펙의 하나가 되는, '보이는 것'만 보는 세상이다. 아이들을 스펙괴물로 내몰던 그 시절을 좀 알기에, 요 몇 주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표창장 사건을 보면서, 터질 것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위조를 했고 안했고는 전혀 관심없다. 아이들 교육을 빌미로 모두가 미쳐 날뛰던, 우리 시대 가장 아픈 곳의 적나라한 단면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그 하찮은 것들로 인해 내팽개쳐지고 뒤틀어질대로 뒤틀어져 버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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