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3. 22. 수
1. 어제 자기 전에 아빠와 통화를 다시 하려고 했지만 혹시나 다시 잠들었을까 봐 참았다가 조금 전에 통화를 했다. 어제 밤새 아팠다고 한다. 거의 15분 간격으로 토하고,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목에서는 가래로도 모자라 흑갈색의 무언가가 같이 나오는데, 먹고 있던 홍삼인지 경옥고인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병원에 갈까 고민했지만, 다니고 있던 서울 병원으로 갈 수도 없고, 근처 병원은 가봐야 아빠의 상태를 잘 알지도 못하고, 응급실의 소란스러움은 아빠를 더 괴롭게 할 할 뿐이라고, 그리고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진통제뿐일 테니 아빠는 집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 긴 밤을 보내고 오전에야 잠시 눈을 붙였다고 한다.
'내가 지금 갈까?'묻자 아빠는
'니일이나 잘해'라고 한다.
아프지만 아빠는 아빠다.
엄마에게 아빠 상태를 듣는데 내가 계속 '아 진짜?'라고 대답한다. 전에 이 대답방식 때문에 아빠가 화를 내기도 했는데, 이미 '아 진짜?'라고 해놓고 아빠가 화내던 것이 생각난다. 정말 너무하고 무심한 답변이다. 아빠는 많은 것에 많이 화를 냈는데, 그 화가 다소 크고 격정적이라 그렇게 정당한 경우가 많았다. 이번처럼. 아빠는 온몸으로 생생하게 고통을 겪어내고 있는데 딸이 '진짜?'라고 답한다.
결국 고통이란 온전이 자기 자신만의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무색하다. 나만 겪고 나만 아는 고통 앞에 어떤 위로와 공감이 의미 있을까.
2. 요즘 퇴근길에 사과와 고구마를 먹는다. 아주 막히는 구간에서만. 라디오를 들으며 사과를 씹으며 창밖에 쏟아지기 시작한 개나리를 보고 있으면 퇴근길이 아니라 여행길 같다.
3. 오랜만에 홈트를 했다. 춤연습을 하러 갈까 고민하다가 운동을 택했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 올린 케틀벨은 무거웠다. 특히 마운트 클라이밍은... 내 상체가 얼마나 최소한의 근육만 가진 몸덩이인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별거 아닌 동작에 15분도 안 되는 시간에 팔이 후들거린다. 기분 좋은 고통이다. 하루에 5분이라도 집에서 운동을 하자.
4. 아빠는 오늘 결국 119를 불러 응급실에 갔다고 한다. 원래 어제 가려고 했지만, 비도 오고 채비가 안되어 하룻밤을 꼬박 견디고 응급실에 갔다고 한다. 응급실에서 맞은 주사 때문인지 아빠는 갑자기 대변이 마려워졌고, 집처럼 화장실을 오가기 좋은 환경이 아니니 침대에서 대변을 해결해야 했다. (이런 대목이 아빠가 그렇게 아파도 최대한 집에서 버텼던 이유 중에 하나였을 것 같다.) 아빠의 신장이 매우 안 좋아졌다고 한다. 투석이 필요하다고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이동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아빠는 또 대변이 급해졌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빠는 결국 바지에 대변을 봤다. 상상만으로도 그 엘리베이터 안에 누운 채로, 사람들에 둘러싸여 대변을 보았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게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간호사가 엄마를 막아섰단다. 중환자실에 보호자는 못 들어온다고. 엄마가 아빠 대변처리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혼자 보내냐고 하니 중환자실에서 다 알아서 한다고 핸드폰도 들고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단다. 잠깐 응급실에 왔다가 다시 집에 가거나 안 좋으면 입원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엄마는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다. 멀리서 아빠가 아마도 마찬가지로 간호사에게 치부를 보여야 하는 아빠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는 엄마는 아빠의 기저귀를 사들고 와서 다시 항의했다. 어떻게 그렇게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인사할 시간도 안 주고, 핸드폰도 없는 채로 혼자 들여보낼 수 있냐고. 엄마는 강한 사람이다. 아까 엄마를 막아섰던 간호사와는 다른 간호사였던 덕분일까, 엄마의 눈물 때문이었을까, 그 다른 간호사는 이제 혈액투석을 위해 시술 중인 아빠를 잠깐 볼 시간을 주고 핸드폰도 허락해줬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아빠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아빠 투병 이후 아주 오랜만에 맞는 엄마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병원에 엄마 없이 있을 아빠가 걱정된다. 엄마는 걱정되기보다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아빠의 잦은 진통으로 아마 엄마도 늘 선잠을 잤으니까. 오늘 밤 엄마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람일 뿐이다.
8. 엄마가 응급실 얘기를 해주면서 얼마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같이 해줬다. 아빠랑 늘 같이 가던 가게에 갔더니 가게 주인이 '혼자 왔어?'라고 물었다고, 전해줄 것이 있어 간 것이라 물건만 얼른 전하고 나왔는데, 나와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이제 이런 질문을 많이 받게 되겠구나'
아빠가 없는 미래를 경험한 것이다.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의 말이 없었다.
9. 조용한 희망 볼 수록 더 좋아지는 영화다.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너무 다양한 방식으로 고생하고 그래도 다시 일어난다. 오늘 본 7화에서는 주인공이 다시 폭력을 쓰는 남편의 집에서 무기력한 생활을 한다. 그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최고의 장면이 있었다. 이 드라마 표현방법 너무 좋다.
10. 사실 인생이란 이 일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일기를 쓰고, 열심히 일을 하고, 감상에 젖기도 하고, 가족을 걱정하기도 하지만 내 건강을 챙기겠다고 운동을 하고, 다시 엄마아빠의 잠자리에 대해 생각하고, 그러다가 이내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는 일. 그 모든 일이 하루에 일어난다.
'하루'
열심히 적고 보니 더 고단하다. 아니,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