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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Oct 16. 2023

가끔 행복하고 거의 우울했지만, 그래도 좋은 하루였어

2023.03.23. 목


1. 요즘 왠지 기분이 다운이다. 생리주기가 돌아온 것도 아니고, 특별히 나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가라앉아있는 상태가 기본값이 되었다. 아빠의 상태 때문이라고 하기엔 아빠의 투병은 5년이 넘었으니, 나의 안 좋은 기분에 아빠를 태그 하고 싶지 않다. 

  전에는 기분이 괜찮다가 가끔 우울해졌다면, 요즘은 한층 가라앉아 있다가 이따금, 길에서 이제 막 피어나는 새싹과 꽃을 볼 때 가끔 나아진다.


2. 개나리가 파도처럼 피어났다. 나무 가지마다 몽글몽글 봉오리가 맺혀있다. 어떤 봉오리는 이미 활짝 터져 나왔다. 가지마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봉오리들이 몽글몽글하다. 새로운 시작이란 그 느낌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인지, 봉오리를 보는 것은 꽃을 볼 때의 '기쁨'과는 한 층 다른 '기대감'을 준다.

"저것들이 커서 뭐가 되려나"


3. 어제 퇴근길에 운전하면서 전화했다가 아빠에게 된통 혼났다.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통화하는 것이지만 아빠는 그래도 운전하면서 전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전에도 늘 퇴근길에 전화했는데, 병은 아빠를 더 예민하고 화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그 와중에도 틀린 말은 아니니 오늘은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아빠에게 전화했다. 오늘은 엄마가 대신 받는다. 엄마의 목소리 너머 바로 아빠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끙, 끙' 엄마가 설명하기도 전에 '아빠는 괜찮아?'하고 묻는다. 물론 아빠는 괜찮지 않다. 아빠만 잠깐 보겠다고 부산에서부터 온 수녀님이 다녀가신 뒤로 계속 아팠다고, 응급실도 가봐야 소용없다고 집에 있단다.

  

  '이럴 때 나도 누가 같이 있으면 좋겠다'

   혼자서 잘 버티던 엄마가 말한다. '내가 내일 갈까?' 하자 엄마가 학교 걱정을 한다. 그 말은 학교만 괜찮다면 오라는 것이다. 아빠만이 아니라 엄마도 가능하면 불필요하게 본가로 부르지 않으셨으므로,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전주로 가겠다고 답한다. 나는 괜찮다고 수업도, 조회 종례도 부탁을 드리고 가면 괜찮다고 설명했다. 



4. 조용한 희망 또 좋아하는 새로운 콘텐츠와 '여주인공'이 생겼다. ALEX

모든 것들이 쉽게 무너진다. 건강도 삶도 기쁨도 무너지는 나를 붙들어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이다. 모래처럼 부서지는 감정과 흩어지는 기억들을 적어 모으는 일. 


5. 요즘 신랑이 파스타를 자주 해준다. 오늘은 요리도 해주고 주방정리에 설거지도 해준다. 신랑이 주방정리를 할 때 신랑 등뒤에 몸을 살짝 댄다. 신랑이'뭐가 와서 붙었냐'한다. 집에 붙어서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가 있어서 다행이다. 술생각도 났지만 아빠의 병을 핑계로 술을 앞세울 순 없다.


6. 나에게 잘해주고 싶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공부시키고, 꿈을 이루게 도와주고 싶다. 내 꿈을 이루게 도와주고 싶다는 문장이, 채 마치기도 전에 손을 잠시 멈추게 되는지, 왜 눈물이 핑 도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니라 남을 바라본 시간 때문일까. 



7. 아빠는 아프고, 나는 내 삶을 애틋하게 여긴다. 삶을 애정하고, 목말라하는 일. 삶이 어떤 역경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고 그 삶을 살아내는 일, 자신답게 살아가는 일. 나는 그것을 아빠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여전히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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