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내가 공복 달리기를 하는 이유
달리기를 할때는 몸이 최대한 가벼운게 좋다. 달리는 동안 오직 내 호흡과 움직임에 집중하기 위해선 가볍고 편안한 운동화와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심플한 옷차림, 그리고 두 손을 자유롭게 해주는 블루투스 헤드폰과 핸드폰을 넣을 수 있는 허리밴드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 속이 편안해야 하는데 달리는 동안에 몸 속의 장기들도 움직임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살 때의 일이다.) 나는 시간이 될 때마다 우이천을 달렸는데 반드시 아침 식사를 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다음에야 운동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꽤 오랜 기간동안 나의 하루는 커피와 아침식사로 시작되었다. 몸 안으로 무언가 들어가지 않으면 내 몸과 정신은 여전히 어제에 묶여 있는 듯했고, 아침 식사를 해야 장기들이 운동을 시작해서 몸 속에 쌓여있던 것들을 비워내고, 비워내야만 그나마 산뜻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침 식사는 내게 절대적인 루틴 중 하나였다.
그 날도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드립 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달리기를 위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보통 우이천에 도착할 때까지는 걸어서 갔는데 그때까지 내 몸상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적당히 무겁고, 그렇다고 달리기를 못 할 정도는 아니고, 그런정도. 우이천에 도착해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치고, 오늘도 햇살이 따갑네. 좀 더 일찍 달리기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면서 천천히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아랫배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언가 몽글몽글 덩어리진 것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밖으로 나오려는 의지를.
어라? 이럴리가 없는데? 나는 분명 조금 전 화장실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달리던 걸음을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종종 걸음으로 바꿔 걸으면서 조금 있으면 괜찮겠지. 괜찮을거야. 진정하자, 그렇게 속을 달랬다. 뜨거운 햇살이 정수리를 태울 듯 내리쬐는데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뜨거운 두 팔엔 닭살이 돋았다. 몽글몽글 덩어리의 얌전한 움직임은 이내 과격해졌고, 지금 당장 자신을 내보내 달라 고함을 지르는 듯했다.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우이천에는 간이화장실이 꽤 많이 있었고, 나는 아랫배를 자극하지 않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선을 다해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고, 휴지도 짱짱하게 걸려 있었다.
휴…..
그때의 안도감이란… 몇 분이 지나고, 새 하얗던 머릿속에 다시 색깔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절박한 순간에 사람이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해지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며 민망한 미소와 함께 화장실을 나왔다.
그날 나는 달리기를 포기하고 아랫배가 완전히 진정된 것을 확인할 때까지 천천히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이제 옷을 입고 달리기를 하러 나가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자꾸만 꿀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 상태에서 달리기를 하면 어제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렇게 다음날도 나는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달리기를 하지 않은채로 며칠이 지났고, 달리기를 하지 않을 구실을 내가 억지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가 달리기와 영영 이별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어떻게든 내 의지를 실현할 대안을 찾아야했고, 나는 수년동안 길들여 온 나의 루틴을 바꿔보자 결심했다. 바로 아침 공복 상태로 달리기를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연료가 제로인 상태에선 씻는 것도 무리인데다 심해지면 손까지 달달 떠는 내가 과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양치질을 하고 옷을 입었다. 살짝 기운이 없었지만 그래도 전혀 못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 밖은 이제 막 깨어나고 있었고, 선선한 공기가 뭔지 모를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몸상태에 놀라면서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 어느때보다 가벼운 몸과 기분으로 달리기를 마무리했다.
세상에나, 공복 운동이 가능한 것이었다니!!! 그동안 아침 식사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한 나머지 아침 식사 없이는 하루의 시작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늘 공복인 상태로 달리기를 해오고 있는데 한 번도 배가 아파서 화장실을 찾다가 달리기를 멈춘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났을때 특별히 허기를 느끼는 날도 있지만 막상 달리기를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달릴 기운이 난다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복 달리기의 좋은 점은 단지 몸이 가벼운 걸 넘어서 아침 일찍 무언가 할 일을 하나 끝냈다는 만족감, 그리고 그 일을 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과 준비가 필요하지 않다는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날’의 아찔했던 경험은 내게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주었고, 하나의 루틴에 너무 메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지만 앞으로(도) 식사 후(최소 2시간 내)에 달리기를 할 생각은 없다. 글쎄,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이 나의 루틴을 바꿀지도 모르지만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