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위에서 맞이한 아침은 떠오름이 아니라 빛들의 하강이었다. 어느날 일출을 보고자 바다를 찾았던 적이 있다. 바다밑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해 바다와 접한 하늘의 경계면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일렁임사이에는 붉음과 바다의 푸름이 함께 섞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보다는 묘하게 어울려 색의 신비가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떠오르는 해는 붉음의 에너지를 넘치지 않을만큼 구형의 몸에 다 담아내고는 자신의 힘을 감추기 위해 시야를 흐트림으로 높이 높이 떠올랐다. . 해는 점점 더 상승했고, 더이상 눈높이가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떠올랐다. 해는 떠올랐다. 과연 그러할까? 아니었다. 해는 떨어졌다. 하강한 것이다. 그것도 천의 색을 가지고 신의 놀이터에서 인간세상으로 조용히 은밀하게 그럼에도 자신의 위대함을 감추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바다와 하늘이 이어진 우주는 더이상 경계를 허락하지 않고 그것이 하강인지 비상인지 묻지 않는다. 바다와 하늘이 교대로 그를 품어 거칠고 강렬한 자의식을 쓰다듬는다. 유한한 세계를 살아가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해"라 부르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 하늘과 바다는 품고 어른다. 종국에 그 얼굴을 내보일 때에는 덩그러니 혼자 내보내지 않고, 다양한 색의 띠를 두르고 조심스레 다가가게 한다. 하지만 그 다양함이 모두 드러나지는 않는 까닭은 인간 시야의 한계때문이다. 더욱이 빛의 색깔을 구별해내기에는 그 지식의 무용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신이 만든 인간이다.
신의 성실함으로 만들어내는 아침이라는 선물은 창조의 조력자가 함께 한다. 구름이 그 빛을 산란시키고 적적한 농도로 자신을 더해감으로 농담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반사와 수용. 품음과 내놓음의 분량에 따라 아침의 색을 자유롭게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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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그렇다. 쉽게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없다. 하나라 생각하는 것이 결코 하나이지 않다. 우리의 삶의 길도 그러하다. 오직 보이는 그길만이 길이 아니다. 여러 길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하나만 보길 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신의 자비는 거기에 있다. 어느 길위에 있든 빛을 주시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떤 색을 더하고 뺄지 그것은 신의 능력이 아니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변치 않는 것은 "빛이 있는 동안에는 걸어야 한다."는 것. 그 빛으로 오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빛이 있는 동안에는 걷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취약한 인간에게 동반되는 것은 두려움과 또다른 선택에 대한 후회다. 멈출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빨리 걸음을 멈추고 더이상 후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어느정도 리스크를 감당하고라도 새로움을 개척해나갈 것인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살아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만 나이를 먹고 보니 더 이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그렇게 옳은 것도 틀린 것도, 딱 이것이다는 것도, 별 다를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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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지구에서 아침이 상승하든 하강하든 그들의 눈부심과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하루는 선물이다. 그런까닭에 빛이 있는 동안에는 걷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고 힘있게 살아낼것을 무용할지라도 다짐을 하게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