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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채 Oct 25. 2017

내 이야기를 들어줘

 내 속에 말이 꽉 차서 터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이 압력을 줄이려면 어떻게든 해야 했습니다. 알고 지내던 친구에게 실수로 뱉어내기도 하고 인터넷에 남몰래 글을 써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나도 그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텐데. 말의 홍수 속에서 내 마음은 익사 직전이었지만 수문을 열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지만 꾹 삼킵니다. 내가 한 말이 나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의에 했던 말이, 푸념처럼 늘어놨던 말이 칼날이 되어 나에게 꽂힙니다.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백 번도 더 받고 털어놓은 이야기가 순식간에 학급 전체에 퍼져있기도 하고, 내가 돌멩이라고 말했던 것이 거대한 돌산으로 와전되기도 합니다. 오랜 친구들은 전화기 너머로 나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남을 믿으면 너만 다친다고.

 

 말은 상대를 가려야 한다고 합니다. 말이 많을수록 득 보다 실이 많아집니다. 적을수록 좋습니다. 말이 적으면 실수가 적고, 실수를 하지 않으면 손해 볼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상처받지 않으려면 내 생각은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 상처를 예방하는 비결입니다.

 그래서인지 익명게시판이 여전히 인기입니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친구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차마 꺼낼 수 없었던 마음속의 말을 그곳에선 쏟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나를 손가락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 인한 파문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익명의 매력입니다. 거기에선 나의 지인이라면 쉽게 할 수 없을 무조건적인 위로도 어렵지 않게 나옵니다.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서 쉽게 할 수 없었던 위로. 괜찮아 다 잘될 거야, 힘내.


 어쩐 일인지 가까운 사이일수록 위로에는 전제가 붙습니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너는 늘 그런 식이기 때문에- 하는 식으로요. 위로보다 먼저 날아오는 이 전제 때문에 바라는 것을 얻었음에도 결국 어딘가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위로하는 사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과 친구같이 소중한 사람에게는 무조건 적인 위로를 함부로 남발할 수 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사랑하면 할수록 더 날 선 충고를 던집니다. 가만히 들어주는 걸로는 부족한 것 같아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너무 큰 탓에 그렇게 합니다. 듣기 싫은 소리지만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대안이 없는 위로는 무책임한 것이고, 소중할수록 위로보다 충고가 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위로를 바라는 사람에게 충고를 하면서 내가 이만큼 너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위장하는 것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조차 이해받지 못한다는 절망감은 안겨 줄 수 있겠지만요.

 이처럼 네 생각해서 하는 소리라는 포장 속에 남도 하기 어려운 독한 말을 담아 던지는 이유는 자신이 하는 위로에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있습니다.


 위로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가만히 들어주기만 해도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신묘한 해결책이나 위대한 조언을 구하려고 내가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는지 구구절절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두 개의 작은 울림통처럼 공명할 수 있는 상대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내 소리에 답하는 상대로 인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입에 안 맞으면 뱉고, 마음에 안 들면 벗어버리는 아이처럼 일차원적으로 행동해도 용서받고 싶습니다. 미운 짓만 골라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위로받기를 원했습니다. 돈을 많이 못 벌어도 칭찬받고 싶습니다. 성공하지 못해도 인정받고 싶습니다. 내가 나라는 것 그 자체로 어여쁘게 여기고, 가나다만 익혀도 감탄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는 자동차세를 납부하고 부모님을 부양하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직도 어린아이를 감춰놓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라는 것은 주민등록증에 선명히 박힌 이름 석자처럼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에 늘 불만이었고, 내가 꿈꿨던 멋진 사람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했습니다.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이해와 사랑을 갈구했지만 정작 나 스스로도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늪지대에 빠진 사람이 밟고 있는 작은 돌처럼, 나를 일어설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로 타인의 이해를 사용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타인 없이는 스스로를 느낄 수 없기에 더 간절하게 상대를 찾아 헤맸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속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간절하면 할수록 자존감이 깎여나갔고 상처가 누적될수록 내가 나라는 느낌은 희미해져 갔습니다. 내 마음처럼 나를 이해해 줄 사람, 내 입속의 혀처럼 나를 알아봐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느 날 작고 예쁜 일기장을 하나 샀습니다. 빨간 가죽 커버에 연도와 나이를 각인한 것이었습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그것을 꺼내 놓고 일기를 썼습니다. 깜빡하는 날도 많았고 쓸 말이 없었던 날은 더 많았습니다.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이 없는 날에는 오늘은 아무 일이 없었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누군갈 붙들고 내 뱃속까지 다 뒤집어 보여주고 싶은 날이 오면 음악조차 켜지 않고 일기를 썼습니다. 그렇게 쓴 일기장이 어느새 열 권을 넘겼습니다.


 타인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손쉽게 위로받는 방법이었지만 그만큼 내 생각과 비밀이 노출되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 대신 침묵 속에서 일기를 썼습니다. 듣고 있는 상대가 있었다면 감히 하지 못했을 말까지 일기장은 제 살을 내어주며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담백하게 줄 그어진 종잇장 뭉치는 내 생각이나 말투를 판단하지도, 비웃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하는 하찮은 생각과 말 못 할 비밀들을 구별 없이 모두 삼켜주었습니다.

 일기장이 나를 받아들이는 만큼 나는 비워질 수 있었습니다. 일기를 쓰는 것은 나와 단 둘이 나누는 조용한 대화, 스스로를 더 잘 들여다보도록 도와주는 돋보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많은 말들이 필터 없는 날것으로 기록되었고, 기록되는 그만큼 마음의 압력도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나는 내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나 자신과 대화하고 스스로를 안아주는 것이 일기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입이 무거운 친구가 필요하다면 일기장을 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펜을 들어 쓰다 보면 소리 없이 조용히, 치유가 찾아옵니다.

 

 

 


글 그림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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