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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채 Oct 31. 2017

거절 잘 하는 법


 검색창에 '거절 잘하는 법'이라고 입력해 봤습니다. 친절한 블로거들이 예시까지 곁들여가며 거절의 노하우를 알려줍니다. 부장님의 부탁을 원만하게 거절하려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친구의 부탁을 잘 거절하려면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이번만 거절하는 것일 뿐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다음엔 꼭 같이 하자고 말해야 한답니다.

 이런. 그냥 존재 자체가 싫은 상사나 친구에겐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절을 잘 하는 비법은 한 마디로 선의의 거짓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부장님한테 추가 업무를 더 받기 싫다는 나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면 돌아오는 것은 모욕에 가까운 싫은 소리와 야근뿐일 것입니다. 친구에게 너의 SNS 인증 사진 배경이 되기 위해 더치 페이까지 하며 너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했다간 그 날 당장 언팔을 당할게 뻔합니다. 아쉽지만 다음에 기회 되면 밥 한 번 먹자는 빈말 말고는 뾰족한 묘수가 없어 보입니다.


 똑 떨어지는 긍정, 단호한 부정 둘 다 어딘지 예의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이 한반도의 정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 아니오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에도 '그런 편이죠' 라던지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하는 식으로 완만하게 돌려 대답하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이름 뒤에 꼬리표처럼 직급을 다는 나이가 되면 이 돌려 말하기의 기술은 연봉과 직결됩니다. 오늘 퇴근하고 한 잔 하자는 부장님을 절대 섭섭하지 않게 만들면서 효과적으로 거절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잘 하는 사람, 사람 참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거절은 어렵습니다. 거절을 잘 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아. 너의 부탁에 나의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너와 나의 삶이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지금 당장 절교하고 싶은 상대에게 솔직하게 말하면 아주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진심의 폭탄들입니다.

 그 폭탄 같은 진심 대신 매끄러운 하얀 거짓말이 내 혓바닥을 타고 흐른다면, 우리는 위기를 모면하면서도 오히려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집에 일이 있어서, 선약이 있어서, 병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듣기 좋은 전제로 거절을 장식합니다. 상대에게 내가 왠지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어서 서서히 멀어지는 계기가 되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노릴 수 있습니다.


 나는 겉으로는 함께 할 수 없어서 너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제발 내 앞에서 사라져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거절 잘 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나의 속셈은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 아무런 마찰이나 고통 없이, 빠르고 자연스럽게 상대와 멀어지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것입니다.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도 않지만 관계가 단절되는 것도 싫습니다. 관계의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역시 상대와 나 사이에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사건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운하네 마네 논쟁할 거리가 없고, 그래야 소리 없이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장님과 나의 관계처럼 이직하지 않는 이상 절대 단절될 수 없는, 단절된다면 내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도 물론 있습니다.


 나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불편해질 만한 상황을 애써 피했습니다. 친구의 단점을 꼬집어봤자 친구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에게 나의 입맛에 맞도록 스스로를 변화시키라고 요구하는 것도 어딘가 좀 이상합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참아가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내가 싫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가진 불만을 상대에게 던졌다가 나 역시 똑같이, 어쩌면 더 지독하고 아픈 방법으로 나의 단점을 꼬집힐까 봐 무서웠습니다.

 많지도 않은 친구지만 이런 식으로 늘 도망을 쳐 버리니 나는 항상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피곤했고, 가까워질수록 무례하게 구는 지인들은 더 피곤했습니다. 외로움이 낸 구멍을 메꾸려고 거기에 사람을 쑤셔 넣을수록 외로움의 구멍은 더 커져갔습니다.

 나에게 기쁨보다 불편함을 더 많이 안겨주는 사람과 친구 하기를 그만둔 날부터 나는 외롭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보다 훨씬 더 외로워 지진 않았습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봐 듣기 좋은 말로 거절하는 것, 만나고 싶지 않은 저녁 모임에 억지로 나가는 것. 모두 다 서로에게 비극이 됩니다. 편하게 연락하면 언제든지 나오는 사이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거절하기 어려워 그냥 나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대 역시 상심의 독화살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절은 원래 불편한 것입니다. 아무리 매끄럽게 기름칠했다 한들 목 넘김이 불쾌하긴 매한가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치 않는 부탁을 참고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싫은 자리에 꾸역꾸역 나가 재미있는 척 호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절하는 게 어려워서, 좋은 사람 소리 들으려고 나의 시간을 타인에게 쓰는 것은 나의 자존감을 내 손으로 박살 내는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당연히 불편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도 싫은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원하지 않는 부탁이라면, 가고 싶지 않은 장소라면, 먹고 싶지 않은 메뉴라면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알려줘야 합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한들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거절 못하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거절을 잘 하는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용기뿐입니다. 아니오 뒤에 따라오는 어색한 침묵, 나를 피하는 것이냐고 묻는 원망 섞인 질문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의 욕구를 드러낼 용기 말입니다. 하얀 거짓말을 섞어서라도, 속마음과 다른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기어코 거절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입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는 것을 멈추고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아니오,라고 말입니다.





글 그림

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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