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 생활 지침서
우리는 아무 계획 없이 시간을 축내는 경우를 들어 '허송세월(虛送歲月)'이라고 말한다. 흔히 비생산적이고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빗대어 쓴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가장 싫어하던 말이었는데 며칠 전 이 말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쉰다는 건 뭘까?
매거진을 쓰면서 가장 많이 쓴 말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당연히 '재취업'이나 '퇴사'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썼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외로 '쉬다', '휴식', '제대로 쉬기' 등이 가장 많았다. 남들에게는 '쉴 때 제대로 쉬셔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쉬운 마음에 글에다가 휴식을 끄적인 건 아닐까 싶다.
'나는 언제 쉬었을까?'
곰곰이 휴식을 취한 기억을 더듬어 봤다. 군 복무 후 복학했던 2010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제대로 쉰 경험이 없다. 항상 뭔가를 해왔던 기억만 가득하다. 퇴사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원고 작업, 병원 치료 등으로 인해 끊임없이 뭔가 했다. 월급만 안 나오지 일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3개월 정도면 푹 쉰 거 아냐? 여행도 다니고 하면 나을 텐데..."라면서 정형화된 휴식을 종용한다. 이런 말을 종종 듣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제대로 쉰다는 건 뭘까?'
쉬었는데도 피곤하다면?
국어사전에서 휴식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깐 쉼'이라고 나와 있다. '쉬다'의 사전적 의미도 '피로를 풀려고 몸을 편안히 두다'라고 언급한다. 어쨌든 '일을 멈춰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몸을 편안히 둬야' 한다. 사전을 보고 나서 느꼈다. 나는 제대로 쉰 적이 없다.
사전적 의미가 위와 같지 사실 쉰다는 건 사람마다 의미가 다를 것이다. 버스에서 자는 쪽잠도 휴식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한채 쉬고 나서도 휴식이 모자라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놀아본 놈이 잘 논다'라는 말처럼 휴식을 완벽하게 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효과적으로 잘 사용한다. 쉬고 난 후 컨디션을 100%에 가깝게 끌어올리는 지인들을 만나 휴식 특강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다.
"쉴 때는 아무것도 안 해야 돼. 하던 일도 생각 안 하고. 쉴 때 다른 일을 생각하는 순간 휴식은 끝난 거야"
많은 사람이 일과 휴식을 구분하라는 말을 들은 경험이 있다. 대부분 거기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실제 쉴 때 이를 완벽하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조직사회 분위기가 일과 휴식을 여전히 구분 짓지 않고 있는 면도 있고 퇴근 후에도 일과가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요인을 제외하고도 사람들 마음속에서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을 안 하면 쉰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을 하지 않는 상태'를 쉰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3개월 넘게 쉬었다. 하지만 어깨엔 거대한 곰 두 마리가 얹어져 있고 몸 상태도 많이 상했다. 3개월을 쉬었지만 쉬기 전보다 더 망가진 셈이었다.
생산적이지 않아도 괜찮아
휴식을 취한답시고 무언가를 계속 해왔다. 그리고 그것을 하면서 부담감을 가졌다. 결국 일을 하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기계도 수시간을 가동하면 잠깐이라도 가동을 멈춰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오죽하랴. 요새 멍 때리기 대회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강제로 멍을 때려야 쉴 수 있는 시대. 이마저도 비생산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휴식은 생산적이어야 하나? 꼭 그렇진 않다. 개인적으로는 생산성과 거리가 멀수록 좋다고 본다. 시간을 돈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허투루 보내는 시간을 아쉬워한다. 쉴 때도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지난달 내 모습이다.
여행을 갈 때도 글을 쓰기 위해 사진을 찍어야 하고 무언가를 먹을 때도 맛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 빨리 먹고 다른 걸 해야 했다. 가만히 누워 있다가도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 만지작거리기 일쑤였고 읽히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생산성의 늪에 빠진 것이다. 쉴 때 여러 가지를 따지다 보니 휴식 자체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시간은 시간대로 보내고 쉬지 못했다.
그래서 전혀 다른 휴식을 시도했다. 집 근처 벤치에서 한 시간 동안 하늘만 멍하니 쳐다봤다. 어느 날은 책이 안 읽히면 그냥 쌓아두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친구를 만나 하루 종일 수다도 떨고 피곤하면 몇 시간 동안 낮잠도 잤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흐름에 몸을 맡기며 쉬었더니 편했다. 특별히 '잘 쉬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잘 쉬었다'라는 느낌이 드는 것조차 쉬는 걸 열심히 해야 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냥 쉬면 된다. 잘 쉴 필요 없이. 잠시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휴식이 될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글을 보고 '맞아. 아무 것도 안하고 쉬는게 진짜 휴식이지'라고 다짐한다면 그것조차 휴식이 아닐 수 있다. 다짐하지 말고 그냥 쉬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