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첫 날을 보내는 법

퇴사자 생활 지침서

by 변준수

'퇴사한 지가 언제인데 무슨 퇴사 첫날 얘기를?'


글쓰기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늘이 진정한 퇴사 첫날이기도 했다. 넉 달 전 회사를 나올 때는 지금에서야 쉬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회사와 약간의 일이 있었고 좀 어안이 벙벙해서 4월 초에나 정신 차리고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퇴사 전부터 하던 책 원고 작업은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됐고 너무 오래 앉아있다 보니 허리 디스크가 재발했다. 이래저래 힘겨운 4달이 지나갔다. 그리고 책 원고가 끝났다. 진짜 퇴사 라이프가 시작된 것일까? 실감은 안 났지만 마음속에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아직 교정교열과 인쇄 작업 등이 남았지만 원고 내용을 채우는 작업은 끝났다. 다른 사람에게 말은 안 했지만 스트레스를 꽤 받고 있었다. 공동 집필을 하는 다른 필진들은 나보다 해당 분야 지식이 더 많았다. 전공자들 사이에서 비전공자가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용쓰면서 글을 이어갔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글을 쓰다 보니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린 듯했다. 그냥 옆에서 수영하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했으면 됐을 텐데...





첫날이니 특별하게?


첫 날을 조금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극장도 가고 서점에 가서 책도 사고 집에 쌓인 책도 읽고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분위기를 잡아보려 했다. 역시 마음만 앞섰는지 평소보다 늦잠을 잤다. 일어나서 아침 약을 먹기 위해 밥을 챙겨 먹었다. 식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평소보다 허리가 더 아팠다. 결국 거실 돗자리에 누워서 천장만 쳐다보며 2시간을 보냈다.


KakaoTalk_20190729_161417449.jpg 쿠폰 10개를 모아서 공짜로 마시는 커피는 더 맛있다 / 이하 촬영 포카텔로


'뭔가 해야 한다'라는 강박이 또다시 온몸을 감쌌다. 그냥 점심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옆에 책이 집히면 책을 읽고 핸드폰이 손에 잡히면 라디오 어플을 켜 노래를 들었다. 내일모레까지 비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 밖에 딱히 나갈 생각이 없었다. 집에서 쉬는게 편하기도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햇빛이 얼굴을 때렸다. '그래. 나가보자'하면서 아파트 주변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 보니 집 근처 카페에 다다랐다. 자연스레 노트북을 꺼내 커피 옆에 펼쳐놓았다.



끌리는 대로 계획 세우기


평소처럼 노트북을 열고 라디오 어플을 켰다. 이어 브런치 사이트에 접속해 쓰던 글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사실상 퇴사 첫 날인 오늘 특별한 무언가를 하려했는데 정작 마음 가는 대로 하는게 편하다는 걸 알았다. 회사에서는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없는 게 많으니까. 글을 쓰면서 8월에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웠다.


writing-a-business-plan-1.jpg 모든 것을 다 생각할 필요는 없다.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하다 보면 기대 이상으로 해낼 수 있다 / 이하 구글 이미지


지난달부터 준비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건 다음 달로 미뤘다. 아무래도 허리 건강을 먼저 챙겨야 할거 같았고, 신경 쓰일 일을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일 아침 운동을 하기로 했다. 지금도 하고 있지만 횟수와 강도를 조금 높여서 허리와 코어 근육의 힘을 기르고 싶다.


그동안 원고 쓴다고 미루었던 영화 촬영지 여행기를 다시 써볼 생각이다. 우선 첫 글은 전부터 구상해온 '지하철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라는 주제로 써볼 요량이다. <시월애>, <접속>, <엽기적인 그녀> 등 많은 영화에서 지하철은 인상적인 장소로 나온다. 그곳에 직접가보고 영화의 장면을 떠올려보고 싶다. 사실 지하철로 움직이면 편하고 시원하다.


planning.jpg 엎어질 계획이라도 한 번쯤은 세워두면 좋다



우선순위 세우기


꼭 해야 할 일과 가장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데 당장 필요한 일이 아닌 것 정도로 구분해서 계획을 짰다. 운동과 글쓰기는 항상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외에 일들은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해보기로 했다.


영상 공부와 드로잉 공부를 하고 싶어서 관련 정보를 모으고 있다. 평소 알고 지내는 유튜버들은 "굳이 강의 들을 필요 없어요. 인터넷에 올라온 무료강좌만 봐도 영상 편집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해줘서 그대로 해볼 생각이다. 드로잉은 미술학원을 가서 배워야 할 거 같은데 영상보다는 후순위이니 다음 달이나 그다음 달에 해야겠다.


계획을 짜다 보니 무언가 윤곽이 드러나는 거 같았다. 사실 이 계획대로 못할 가능성도 있다. '원래 계획은 엎어지라고 세우는 거다'라는 말도 있으니 실패할 염려부터 하지 않기로 했다. 계획을 세우는 동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정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렇게 계획을 짜도 지키기 어렵다. 다만 내게 가장 필요한 부분과 하고 싶은 바를 비교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중에 뭔가 해야 할 때 도움이 된다.





예전 글에서 퇴사와 동시에 생활이 시작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퇴사 자체에 판타지를 가지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꿈꾸는 것마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한정된 여건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것도 퇴사자의 특권이다. 생활에 관한 것이든, 꿈에 관한 것이든, 배움에 관한 것이든 퇴사 첫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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