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도 백수도 아니지만, 프리랜서라고 하기엔 애매한 날들
작년 9월, 퇴사할 땐 멋있게 '부업으로 월급만큼 벌어서 퇴사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이 말엔 숨은 함정이 있었으니 -
4년동안 직장을 다니며 N잡을 계속 해온 덕분에 항상 월급+α의 수입이 있었다. 작년엔 매달 버는 부업 수입이 월급만큼 되어서 나의 총수입은 회사에서 받는 월급의 두 배가 되었는데, 퇴사하면서 월급이 사라지면서 내 수입은 반토막이 났다.
따라서 '부업으로 월급만큼 번다'는 건 멋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번에 퇴사를 하면서, 쭉 부업을 해왔던 나로서는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딱 월급만 받는 직장인이 된 셈이다. (그것도 고정적이지 않은 월급이라니!)
설상가상으로, 매물을 실컷 보다가 한껏 높아진 눈으로 얻은 작업실의 월세는 135만 원이고, 부가세 10%에 관리비까지 더하면 매달 160만 원이 숨만 쉬어도 내 통장에서 로그아웃 한다. 그리고 이건 전기세나 인터넷, 비품비 등 기타 잡비는 1원도 들어가지 않은 금액이다. 지금까지 10개월 동안 한 번도 안 밀리고 월세를 낸 내 자신이 기특하다. 하하.
하지만 퇴사한 걸 후회하냐고 묻는 다면, 이건 '1초의 망설임도 없이'라는 식상한 수식어가 아까울 정도로 당연히, 너무나도, 격하게, 후회 하나도 안 한다. 수많은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 매일 아침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일어날 수 있고,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
행복은 행복이고, 당분간 저축은 포기하더라도 일단 월세는 밀리지 않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 지금 역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한번 나열해보자면:
1) 주 1회 꽃수업
꽃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강생 1명이랑 겨우 시작한 클래스를 3년째 하고 있고, 지금은 나의 주 수입원이라니 인생이란 너무 신기하다. 원데이 클래스라 매번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탓에 권태기도 자주 찾아왔지만, 스스로도 느껴지는 조금씩 발전해나가는 모습에 꾸준함의 힘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도 좋고, 꽃도 너무 좋아서, 뭔가 더 확장해서 해보고 싶은데, 뭘 더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 초 유튜브 해보려다가 영상만 좀 찍다가 포기하고, 오늘은 인스타를 만들어봤다. 수많은 꽃집 중에서 내 스타일이 있는 꽃을 만들고 싶다. 꽃수업 5년 차에는 할 수 있을까.
2) 폴인 객원에디터
올해 2월에 폴인 객원에디터에 지원했다. 지난 11월부터 구독하고 있고, 또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해서 열심히 읽고 있는 플랫폼이라 도전했다. 퍼블리에서 쓴 글이랑, 출판사 경험을 노션으로 정리해서 지원했는데 딱 한 달만에 연락이 와서 매우 기뻤다. 첫 편집으로 '스타트업 홍보' 관련 콘텐츠를 편집하고 있다. (6월 초부터 순차적으로 발행될 예정!)
꽃수업이 '사업'의 영역이라면, 에디터, 편집자는 뭔가 사업과 직장 사이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쌓았다'라고 표현하기엔 짧지만, 내 인생에서는 가장 긴 2년 8개월의 출판사 커리어를 이어가는 일이기도 해서 소중하다. 사업은 나 혼자 시작해서 자유롭게 확장이나 축소가 가능한 반면, 편집 일은 혼자서 하기는 어려우니 (출판사를 차리지 않는 이상), 편집자 커리어는 조금 더 열심히 관리해나가야 한다는 필요성도 느낀다.
3) 출판사 4시간 아르바이트
하루종일 혼자 있다가 통으로 날려 버리는 하루하루가 점점 많아질 무렵,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카페, 빵집, 식당, 다 상관없고, 하루에 4시간 정도만 하는 일이면 뭐든 하려고 작업실 근처의 아르바이트 공고를 다 뒤졌다. 그러다가 정말 신기하게 꽤 큰 출판사의 해외기획팀에서, 그것도 알바 치고는 꽤 좋은 조건으로 사람을 모집하고 있어서 (나쁘지 않은 시급에 4대보험에 연차까지!) 지난달부터 출판사 알바를 하게 되었다.
하는 일은 해외 도서의 목차 번역을 비롯해서 도서 뉴스레터, Rights Guide 보기, 책장 정리하기, 3공 바인더에 서류 철하기 등 간단한 일인데, 직장인은 싫지만, 강제적으로 출근할 곳이 있는 건 '생산성'에 꽤나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8시간은 절대 안된다... 4시간이 아주 맥시멈이다 ㅋㅋ)
그리고 2번의 편집 일과 알바를 동시에 하면서 느끼는 건데, 알바 가서 하는 일들은 너무 쉬워서 '평생 알바만 하고 살면 안 되나...?' 생각이 절로 드는 반면, 에디터로 하는 편집은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다. 근데 두 가지 일의 월 수입은 비슷하다. 노력 대비 수입만 생각하면 당연히 알바 압승인데, 생각해보면 이 일은 10년을 해도 나는 그대로 일 반면, 편집일은 할 때마다 스스로 성장하는 게 느껴진다. 앞으로 3년, 5년, 10년을 계속한다면 나는 꽤 괜찮은 편집자가 되어 있겠지. 이 생각으로 더 열심히 하게 된다.
N잡러라고 하기 민망하게, 사실 지금 메인으로 하는 일은 위에 3가지다. 그래도 매거진 이름에 맞게 곁가지로 하고 있는 일도 조금 추가하자면:
4) 친구와 브랜드 만들기!
클럽하우스 N잡러 방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서, 같이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아직 5번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브랜드 이름이랑 컨셉이랑 다 나왔고, 디벨롭하는 일만 남았는데, 이 정도면 아주 착착 잘 진행되는 거 같으면서도 요즘은 앞으로 잘 나아가지 못하는 거 같다.
그리고 프로그램 중 하나로, 칵테일 원데이 클래스를 기획하고 있다. 그래서 친구랑 같이 조주기능사에 도전하는 중! 필기는 잘 통과하고 실기도 접수했는데, 이제 정말 레시피 외우고 공부해야 된다! 계획 절대 못 짜는 P(MBTI - ENFP예요! ㅋㅋ)는 할 줄 아는 게 벼락치기밖에 없네 ^_ㅠ (+ 7/9일에 합격발표 나왔어요! 저는 이제 조주기능사 자격증 소지자! ㅋㅋ)
5) 코딩 공부
여러 가지 하면서 사는 김에 스킬 하나쯤은 더 추가해도 좋을 거 같아서 코딩 부트캠프에 등록해버렸다. (위코드 27기 등록했어요!) 반백수 생활 1년은 채우고 싶었고, 중간에 10월은 퇴사 1년 기념이기도 하고, 내 생일도 있는 특별한 달이니 백수에게도 방학을 줄 요량으로 11월 개강반을 등록했다.
예습 없이 가도 진도를 따라갈 자신이 있지만 (자신감은 언제나 충만한 편), 이왕 백수인데 예습이라도 잘해가고 싶어서 html, css 이런 간단한 것들을 이곳저곳 기웃거리면서 공부하는 중이다. 슬렁슬렁 말고 이것도 계획을 빡! 세워서 제대로 해보고 싶은데, 나의 의욕은 언제 채워질런지 :p
6) 공간 운영하기
어쩌다가 6번으로 밀려났는지 모르겠지만, 160만 원의 월세를 내려다보니 공간 대여도 하고 있다. 애초에 꽃수업을 위해 마련한 장소인지라, 장소가 수업에 최적화되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데, 근데 막상 수업으로 대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파티와 촬영이 대다수인데, 책상이 너무 많아서 파티 하기에도 걸리적거리고, 쇼핑몰 스튜디오처럼 예쁜 소품도 잔뜩 갖다 놓을 수가 없다.
공간 주인이 변덕쟁이에 줏대가 없으니, 공간도 주인을 닮은 애매한 공간이 탄생했다. 시간 단위로 공간 빌려서 수업 1년도 넘게 한 입장에서는, 내 공간이 있는 거 자체가 너무 감사한데, 월세 벌려면 더 노력해야 하는데 잘 안 된다. 애매한 공간을 그냥 애매하게 방치하고 있다. 뭔가 이 6번이 제일 나 같고 애매하고 답이 없다. 하지만 또 그래서 가능성 가득하고,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게 매력이지! 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