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을 맛본 만화 도전기
그림 그리는 이야기를 쓰다가 문득 떠오른 에피소드가 있다.
수년 전에 지인이 책을 내는데 나의 스타일로 그린 삽화를 넣고 싶다고 요청하셨다. 몰입하며 드로잉 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터라 큰 고민을 하지 않고 냉큼 하겠다고 했다. 지인의 일상 얘기를 웹툰 식으로 만들어 챕터별로 한 페이지씩 들어가는 것인데 막상 이야기를 받고 보니 그때부터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하겠다고 한 과거의 나를 원망했다. 취미로 그린 그림이 일이 되는 순간 더 이상 나의 그림이 아닌 타인의 요구를 넣은 나의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리기 전부터 그린 후까지 완성으로 가는 일의 단계가 더 생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데뷔 후 얼마 안 되어 인지도와 음악적 인정을 잡은 그룹 에픽하이의 타블로도 음악을 취미로 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 인터뷰를 본 기억도 동시에 떠올랐다. 좋아하지만 그것이 일이 되는 순간 좋아할 수 없다는 것을,
음악을 취미로 할 만큼 경제적 여유를 원하는 그 말이 나에게 울림을 줄지는 미처 몰랐다. 역시 경험을 많이 해봐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그리기 시작했다.
많이 그리는 수밖에 없겠다 생각하며 독학으로 다양한 만화체 그림을 따라 그려보고, 이야기의 장면을 상상하며 그리고 또 그려 지인께 주었지만 내가 상처받을까봐 그런지 출판 컨셉상 글만 실리게 되었다고, 그림이 실리지 않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주어진 작업 시간 동안 삽화 실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내 깜냥에 아니었나 보다 아쉬웠고 지인께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인정받지 못한 좌절감은 고스란히 마음에 남아 쓰라렸다.
'그래,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해야 되나 봐' 하며 스스로 다독였던 그때가 문득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그 때 그림을 다시 본 지금은 취미로 그리는 그림이 당연히 일로써 인정받을 수는 없을 터, 일로써 인정받는 그림을 못 그린 내가 지나치게 자기합리화한 건 아닐까. 어찌보면 그 때의 좌절로 남에게 내 그림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그리라고 한다면 그 때의 태도로 그림을 대하지 않으리 다짐한다. 그나저나 그런 기회가 또 올까.
뭐,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