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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라 Jan 27. 2024

동유럽 2일 차 : 엄마의 최애 장소를 만나다

엄마의 꿈 많은 어린 시절 이야기

각자 뭉친 다리를 풀고 눈을 깜빡했는데 둘째 날이 밝았다. 아침 8시 호텔 앞 버스에서 일정이 시작되니, 내가 바랐던 여유로운 아침 산책은 5시에는 일어나야 가능했기에 마음을 접었지만 그래도 6시에는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와야 조식이나마 여유롭게 먹을 수 있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첫째 날 저녁 식사로 보아 앞으로 남은 일정 속 점심, 저녁도 맛있는 음식을 먹기는 힘들 수 있다는 예감이 들어 조식의 평이한 유럽식 뷔페(햄, 빵, 커피)라도 든든히 먹어야 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준비를 다 마치고 7시쯤 식당에 도착했는데 긴 줄이 있었다. 우리 팀 말고 다른 패키지팀도 숙박을 하여 아침 식사하는 사람이 100명은 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줄로만 서서 음식을 담아 대기 시간이 길어졌다. 20분 넘게 줄을 서서 10분 만에 먹고 후다닥 짐을 싸고 나오니 겨우 집합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다행히 나와 엄마가 빨리 먹는 편이라 가능했다. 이때만큼은 천천히 먹으려 노력하지 않았고 엄마에게도 천천히 먹으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네 ^^;  이로써 패키지여행에서 아침 식사는 부지런해도 여유 있게 먹기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식당냥에게 빵을 줄까 말까 고민하며- 첫 조식 즐겁게 먹었다



버스를 타면서 크로아티아 기사한테 어제 가이드한테 배운 크로아티아 언어로 "Dobro jutro~"(도브로 유트로)라고 아침인사를 하고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슬로베니아의 역사를 읊어주셨다. 위로는 오스트리아, 오른쪽 옆에는 헝가리, 왼쪽 옆으로 이탈리아, 아래로 크로아티아로 둘러싸여 있는데 역사적으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동유럽에서 가장 유로화를 먼저 시행한, 동유럽이지만 서유럽 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생활 면에서도 예술, 환경친화적이고 마을들이 예뻐서 가이드는 한 달 살기를 한다면 단연코 슬로베니아를 선택한다고 할 정도로 우리들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셨다.

크로아티아도 귀여운 소형차가 많았다


류블랴나에 도착해 만남의 장소, 프레셰렌 광장(Presernov trg)으로 걸어가며 실제로 보니 가이드 설명을 들어서 그런가 어제 간 자그레브와 분위기가 달랐다. 건물의 양식과 길이 더 촘촘하고 더 정교했다. 자전거를 많이 타고 사람이 많이 걷는 구역은 자동차의 진입을 막았다. 불가피하게 차가 지나갈 때에는 일종의 전자동 통행 바가 있어서 허가를 받은 경우 바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바가 올라갔다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다들 신기해했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가 좋아하는 동네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정말 우리나라에도 어서 도입되었으면 하는 우유자판기가 있었는데 자신이 갖고 온 병으로 원하는 만큼 우유를 따라갈 수 있는 자판기였다. 곳곳에 일상적으로 누구나 쓸 수 있는 제로웨이스트 시스템이 있어 류블랴나의 또 다른 이름, 그린시티 그 자체였다. 루블랴나의 의미가 '사랑스러운'이라는데, 정말 내가 살아보고 싶은 사랑스런 녹색 도시였다. 엄마는 나만큼 감탄하지는 않았고 줄곧 이름 모를 동상과 다리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어 하셨지. ^^;  


도시 곳곳에 공유자전거 그리고 정말 탐났던 우유 자판기!!
자유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책방 탐방도 할 수 있었을 텐데 ㅠㅠ
나의 엄마 다리도 아프면서 고무 샌들은 왜 챙겨 왔을까...


성 니콜라스 성당을 지나고 나니 시장이 등장! 유럽 하면 떠오르는 활기찬 시장 분위기가 물씬 났다. 류블랴냐 성과 푸니쿨라 탑승 옵션 관광을 선택하지 않은 덕에 시장도 한 바퀴 구경할 수 있었지만 엄마는 이미 오늘 하루치 걸음을 다 걸었기에 노천카페에서 자유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천을 따라 끝없이 줄지어있는 카페에 끝없이 사람이 앉아있는 풍경, 유럽이었다.


유럽인 모드로 나는 에스프레소를, 커피를 잘 못 마시는 엄마는 달달한 코코아를 시켜 (카페 이름이 코코아라 왠지 시그니처일 것 같았다) 드렸다. 엄마는 내가 주문한 에스프레소 컵을 귀여워했다. 아니 신기해했다고 해야 하나. 이 작은 걸 판다니! 먹다니! 하는 느낌 ㅎㅎ


내가 물었다.


나 : 여기 오니까 어떻습니까?
엄 : 또 다른 도시를 보니 차~~ 암 예술의 나라 같애요.
나 : 끝?
엄 : 그냥 즐겁습니다. 바라만 봐도 좋아요. (잠시) 우리나라 선조 다리는 아무것도 아니네 하핫 건물의 공간은 하나도 없어.
나 : 틈이 없지. 배 지나간다.
엄 : 어느 나라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똑같애.


대화의 흐름이 이런 식이라 제대로 된 엄마 관찰 인터뷰를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번 카페에서 자유시간에는 엄마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엄마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삼중교(Tromostovje)를 그려보라고 했고 엄마는 여전히 검지손가락이 펴지지 않지만 흔쾌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대하는 엄마의 자세


엄마는 나의 어린 시절 그림 숙제를 대신 해줄만큼 그림을 잘 그렸다. 취미 삼아 그림을 계속 그리면 좋겠건만 그러지 않으셨다. 이번 여행에서 작은 수첩과 펜을 챙겨 와 틈틈이 자유시간 때 엄마에게 그림을 그려보라 할 작정이었다. 작전이 통했다.


엄마는 그림을 그리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범상치 않게 여겨 아주 잘 가르쳐주셨다고 했다. 대회도 나갈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는데 나간 대회에서 덧칠을 실수하여 그림이 번지고 말았단다. 그래서 상을 못 탔다고 아쉬워하셨다. 그렇게 좋아하던 그림도 중학교까지 그릴 수 있었다고 했다. 미술은커녕 고등학교 진학도 못할 정도로 집안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고 했다. (참고로 엄마는 11남매 중 10번째다.)


나는 엄마에게 지금이라도 이렇게 그리면 된다고 했다. 엄마는 맞다고, 이렇게 그리니까 기분이 좋다고 했다.  


카페에서 엄마의 다리 에너지를 다시 채우고 다음 행선지인 블레드 섬으로 갔다. 거기서 점심으로 먹은 스테이크는 장조림이 생각나는 그리운 한국의 맛이었다 정도로 긍정적으로 묘사하겠다.


사진만 봐도 너무 짰던 맛이 기억난다...


블레드 섬은 큰 호수 위에 떠있는 섬인데 아주 고혹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마치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민물 인어공주님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 날이 좋아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한 사람이 노를 젓는 큰 나룻배도 타보고 섬에 있는 마리아 승천 성당에서 들리는 종소리도 들으며 젤라또를 야무지게 먹었다. 엄마는 블레드 섬이 너무 좋다며 이곳이 최고다라며 이미 최애 장소로 찍어두었다. 앞으로 더 일정이 남았는데 섣부른 거 아니냐는 딸내미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최고라고 했다. (과연 끝까지 엄마의 베스트 장소일지는 연재 끝에서 알 수 있다)


 


막간의 자유시간, 엄마와 나는 호숫가에 앉았다. 엄마는 어린 시절 산속 조그만 굴뚝 있는 집과 산, 지금 자신이 보는 장면을 그렸는데 그 풍경이 눈앞에 있는 게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부드러운 능선의 산, 에메랄드 호수 그리고 블레드섬


여행 이틀 째, 그림 같은 풍경 그리고 엄마의 그림 덕분에 엄마도 나도 여행 만족도는 이미 매우 만족이다. 앞으로 남은 일정은 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


엄마가 드로잉한 삼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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