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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Jul 08. 2019

일상이란 기적

Nothing more factastic exists

어느 기독교 신자가 어째서 예수가 생전에 행한 기적을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볼 수 없는지 나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함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흔들리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나는 형이상학적 이론에 의거해서 확신에 찬 대답을 해 주었다. 당신이 세상에 나와서 또 다른 기적의 산물인 나와 마주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인데 어찌하여 따로 기적을 기대하느냐고 말이다. 그 사람은 그 말에 크게 기뻐하였다. 이 세상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자신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일상이 곧 하나님의 기적임을 인지하지 못한 불찰을 깨달은 것이다.


 이 세상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자신이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일상이 곧 하나님의 기적임을 인지하지 못한 불찰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은 환상적 별천지의 세계에 대한 욕구가 따뜻하게 익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환상적 별천지의 세계에 대한 욕구가 따뜻하게 익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유와 근거를 댈 수 없지만 말하자면 인간은 그렇게 생긴 존재이다. 따뜻한 욕구는 자극을 받으면 뜨겁게 폭발한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처럼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당연히 그러하니 호모판타지라고나 할까, 판타지를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인간이 자신이 위치한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을 다루는 학문분야는 미스티시즘(mysticism 신비주의)이다. 인류문명의 발전에 미스티시즘이 기여한 바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종교가 그러하고 과학이 그러하며 예술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간절한 사랑이 그러하다. 그래서 미스티시즘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그림이기도 하다.


신비주의는 창의적 사고력의 결정적 연료이기도 하고 자신을 파괴시키는 독약이기도 한 것이다.


신비주의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위대한 상상력의 동기가 되어주지만, 현실과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과 의지가 작용하는 만큼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오류 또한 그득한 심리 작용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창의적 사고력의 결정적 연료이기도 하고 자신을 파괴시키는 독약이기도 한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이 위치해 있는 현실, 즉 히어앤나우 (here and now: 지금여기)와 자신을 분리시켜 붕 떠있는 심리적 계기가 필연적으로 동반되는데, 무척 고통스러운 상태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들뜸’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심리상태와 유사하다. 권장모드인 사띠(sati, mindfulness)가 온전히 진행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청춘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 꿈에 그리던 세계로 들어가려고 고민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고통은 청춘의 심벌이 아니겠는가? 나이를 먹고, 그런 고통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일상적인 뉘앙스대로 부정적이기만 한 현상은 아니다. 지금여기에 앉았으니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의 존재와 존재현실을 일치시키는 것을 실존의 상태라고 설명하였는데, 씽크로(synchronization: 동기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러니 실존으로의 도약은 그리고 자기 자신과 지금여기의 동기화는 부정적 의미의 신비주의의 포기를 수반한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애들이라 그런가”(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선우의 대사) 무척 돌아다닌다. 아이들이 쏘다니고 판타지를 찾고 그리고 고통스러워하고 이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린 날 판타지에 사로잡힌 전형적인 케이스를 구경하려면 1960년에 발표된 어느 뮤지컬을 보는 것은 좋은 선택이다. 공교롭게, 아니 포인트를 정확히 짚은게지, 제목도 판타스틱스(Fantasticks: 과거에는 ‘철부지들’이라고 번역하기도 했음)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he_Fantasticks 그러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 만큼 성장한다는 전제하에서 말한다면, 쏘다니는 마음이 점점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비동기적 인생이 동기적 인생으로 변모하는 것이니 ‘발전’이라 할만하다. 고통도 그만큼 줄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된다. 기독교적으로 사고한다면, 하나님이 만든 기적은 내가 지금여기에 가득하다는 것을, 그리고 판타스틱한 미래는 내가 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그 기적을 온전하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판타스틱한 미래는 내가 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그 기적을 온전하게 사용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레비스트로스 풍의 구조주의적 이분법이며 그 사이에 놓인 명백한 구분이다. 이것은 ‘파악 가능한 것’과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치환하여도 성립한다. ‘가까운 것’과 ‘먼 것’, ‘(가격이 저렴하여) 접근 가능한 것”과 ‘(가격이) 넘사벽’인 것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그 강이나 바다, 터널 같은 경계가 설정되는 것에 우리는 종교적 문학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신화적 기술에 의해 정착된 관념적 세계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는 강이 놓여 있기 마련이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는 그만큼의 구별이 있다.   


우리 부모님들는 집안에 철학 전문가와 의학 전문가가 함께 살고 있는데, 자식이란 이유로 신뢰하지 않고 남의 말에 더 큰 신뢰를 가지신다. 물론 두 분은 어느 분야라도 전문가인 사람을 구로 두고 계시지는 않다. 우리 두 전문가의 말은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혹은 유튜브) 강 건너에 있는 권위 있는 누군가의 입을 통해 부모님께 전달되고 부모님들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기가 막힌 정보로 그리고 새로운 뉴스로 전달하게 된다. “엄마 그거 저희가 몇 년 전부터 반복해서 말씀드린 거잖아요?”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우리는 먼 곳의 어딘가에는 맛집이 있고 우리 동네, 우리 골목에는 맛집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먼 곳의 어딘가에는 맛집이 있고 우리 동네, 우리 골목에는 맛집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맛집이라고 멀리까지 가보면 정작 그 동네 사람들은 좀처럼 찾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 맛집이라는 것이 그저 그런 경우가 대다수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집이 진정한 맛집이라도 사람들은 자기 동네 맛집에 평가는 인색하기 일쑤이다. 익숙한 것은 신비주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호모판타지’라는 말을 쓸만한다. 먼 것은 아름답고 가까운 것은 추하다. 알면 가치가 없고, 모르면 귀하다. 가격이 싼 것은 맛없고 가격이 비싼 것은 맛있다. 사람들의 판타스틱한 상상 속에 부잣집은 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재벌집 식탁처럼 그렇게 먹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대부분은 여느 집과 다름없는 소박한 규모의 식사를 한다. 예수를 어렸을 때부터 보았던 베들레헴의 동네 사람들은 선지자가 되어 돌아온 예수에 감복하였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창조의 기적으로 도래한 세상천지는 너무나 익숙하여 특별한 가치가 없다.


꿈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꿈이기 때문이다. 간절했던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법이다. 더 이상 꿈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꿈 속에 사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현재 나의 삶 속에 어떤 과거의 꿈들이 혹은 누군가 타인에게는 꿈같은 일이 실현되어 있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 간절히 원했던 학교에 들어갔다면, 꿈에도 그리던 명품백을 가졌다면, 혹은 마음 아파서 잠 못 드는 짝사랑을 하다가 그 사람과 사귀게 되었다면 이것들은 모두 판타스틱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 이웃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명문대에 합격하고도 더 좋은 학교에 합격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꿈에도 그리던 명품백을 손에 얻고 나면 그 백을 행복하게 들고 다니는 시간도 거의 없이 즉시 다른 가방에 관심이 옮겨가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나면 그 사람을 귀하게 보살피는 것보다는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느라 늘상 싸우고 토라지고 하지 않는가? 창조의 기적으로 도래한 세상천지는 너무나 익숙하여 특별한 가치가 없다. 엄마는 어차피 늘 희생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라고 엄마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엄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사람을 간절히 부러워한다. 엄마가 있다는 것은 그리고 엄마가 있었다는 것도 기적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친구도 아내도 남편도 그러하다.


엄마가 있다는 것은 그리고 엄마가 있었다는 것도 기적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친구도 아내도 남편도 그러하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것은 먼 곳에 있는 타인과 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판타지적 욕구를 잠재우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는 데에 일차적으로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사랑은 자신을 돌보는 마음을 남에게로 옮기는 것이라 자신을 아끼고 가꾸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이타적인 삶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멀리 있는 큰 가치를 일단 접어두고 가까이 있는 작은 소망부터 성취해 나가야 한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평범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여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는가?


 “그 뜻을 비워내고, 그 신체를 강건하게 한다”라는 노자도덕경의 말은 무언가를 간절히 추구하는 마음이 없는 무위의 삶을 실천하는 기본적인 마음자세인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의 것이요”라는 예수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판타스틱한 욕구와 허영으로 가득 찬 영혼은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외부 세계의 영향을 끊고 바람이 불어도 결이 일지 않는 물과 같이 고요하게 자신이 집중해야 할 한 가지에 빠져 들어있는 상태 즉 삼매(samadhi 三昧)가 되는 것이다. 만화경에 홀리고 요령에 반응하는 버릇이 있다면 요거요거 버려야 한다. 잘 모르는 남들에게 번듯하게 보이는 데 신경 쓰고 가족과 이웃에게 무례한 버릇은 동시에 버려질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가족을 쳐다보고 이웃을 쳐다보라! 그러면 자기 머리맡에서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파랑색 새가 기적처럼 서서히 그리고 점점 진하게 나타날 것이다.


표지그림: 작가 고선경이 평범한 일상의 집을 판타스틱하게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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