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열린 자만이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경험. 차칼타야산과 달의 계곡
20250218 (7일차)
남아메리카 - 볼리비아 - 라파스 - 차칼타야산과 달의 계곡
아침부터 투어를 떠난다. 라파스에서 3박이나 하니 하루 쯤은 외곽투어도 괜찮을 것이라 판단하여 즉흥적으로 선택했다. 투어는 두 포인트. 라파스 외곽 서쪽에 위치한 해발 5,421m에 달하는 차칼타야산과 반대쪽 동쪽에 있는 달의 계곡이었다. 내가 묵고 있는 숙소까지 픽업을 온 볼리비아인 가이드 페드로는 여느 가이드들처럼 웃는 상의 호인이었다. 그와 운전자 둘로 구성된 가이드는 나를 허름한 봉고차에 태우고 또 다른 여행객들을 하나씩 태우러 간다. 여행객은 나를 포함하여 총 8명. 콜롬비아 커플, 브라질 커플, 페루 커플, 아르헨티나 1명이다. 그렇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스페인어/포르투갈어 사용자였다. 페드로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스페인어가 가능하냐고 묻고 대답을 들은 후, 모든 가이드를 스페인어와 영어 투트랙으로 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중 아르헨티나 친구 1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영어조차 못 한다는 점이다. 아 또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이러이러한 상황에 사람들은 투어 멤버 중 유일한 동양인인 나에게 처음엔 경계심을 가지는 듯 했지만, 여행이란 무엇인가. 우린 우리도 모르게 어느 정도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말은 안 통해도 느낌은 통하게 돼있다. 아주 제한적인 의사소통으로 우리는 서로를 알아간다.
라파스 시내의 두터운 교통체증을 뚫고 산악지대로 올라간다. 페루와 마찬가지로 포장도로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가 아닐 수 없다. 난개발로 건물들이 꽉 들어 찬 라파스 시내와 달리 산지로 나가자 황량한 고산지대의 건조기후에서는 생명체도 찾아보기 힘들다. 가끔 돌아다니는 차량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차칼타야산에 가는 길, 중간에 차를 세워 날씨와 고산병 증상 여부를 체크해보라고 한다. 정말 황량하기 그지없다. 아주 가끔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현지 노인이 무엇을 캐고 있거나 외로운 들개가 지나다니는 정도이다. 페드로는 우리에게 코카잎을 나누어주며 조금 씹어서 반죽된 다음에 삼키지 말고 잇몸에 저장해놓으라고 한다. 마추픽추를 하산할 때 만난 캐나다인 친구가 해준 말이랑 동일하다. 도대체 5,421m는 얼마나 높길래 이리 고산병에 대해 경고하는 것인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거칠고 구불구불하다. 차체의 흔들림으로 인해 워치 만보기가 자동으로 올라간다. 개꿀. 저 멀리 절벽에 산양이 보이는 것 같지만 확실하진 않다. 역시 고산지대 건조한 기후로 나무를 포함한 식물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다. 다른 행성에 온 것 같다. 차로 도착한 곳은 해발 5,300m에 위치한 산장이었다. 그렇다. 차로 거의 정상까지 올라온 것이다. 하긴 가이드가 미쳤다고 그 돈 받고 5천미터 짜리 산을 처음부터 같이 등반하겠는가. 산장에서는 입장료를 받고 정상으로 가는 길을 터준다. 이들은 평소에 문을 닫아놓다가, 가이드로부터 일정을 받으면 그때마다 일시적으로 운영하는 듯하다. 여기서 다른 투어 일행을 만났는데, 희한하게도 여긴 다 영어를 사용한다. 본의 아니게 이쪽과 더 어울리게 된다. 120m 남짓한 높이를 올라가는데, 쿠스코에서 느꼈던 것처럼 훨씬 더 숨이 금방 찬다. 분명 한국에서 등산할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래도 갈고 닦은 체력이 있는지 다른 친구들보다는 훨씬 빨랐다. 숨이 차서 뒷꽁무니에서 앞쪽만 바라보던 그들에게, 나는 동양에서 온 면도 안 한 산악인 정도로 보이지 않았을까. 일반적이었으면 5분 정도 소요될 거리를 30분 정도가 걸려 도착했다. 아무래도 적응이 됐는지 고산병 증세는 없는데 생각보다 더 춥다. 아무래도 만년설이 있으니. 온도를 보니 섭씨 0도 정도 됐다. 평소에 추위를 잘 안타도 고산지대는 역시 쉽지 않다. 다들 털모자에 선글라스에 알뜰하게도 챙겨왔는데 나는 경량패딩 하나로 버틴다. 유비무환. 준비가 안 된 자는 몸으로 떼울 수밖에.
내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고도인 5,421m. 고산병 증세는 안보인다. 아주 다행히도. 바람은 차고 강하지만 여느 산의 정상들이 그렇듯 개운한 느낌이다. 내 남은 인생에서 여기보다 더 높은 곳을 갈 수 있을까. 만년설을 밟아볼 수 있을까. 아마 티벳쪽이나 네팔 등을 가지 않으면 그렇겠지. 같은 그룹의 아르헨티나인 남자는 산 정상에 와본 것이 처음인지 굉장히 감격한 모양이었다. 나에게 영상촬영을 요청하더니 두 팔을 벌려 허공을 향해 스페인어로 무어라무어라 크게 외친다. 아 나도 저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는가. 저렇게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게 부럽다. 태어나서 눈을 처음 본다는 콜롬비아 커플과 이 아르헨티나인은 영상에서나 보던 눈싸움을 하면서 신나했다. 그렇다면 겨울옷은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봤다면 무례한 질문이었을까.
오가다가 여러 친구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정상에서 만난 다른 투어 그룹의 스웨덴인 커플은 나의 사진을 찍어주며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다. 한국이라고 하니 갑자기 둘의 표정이 굳는다. 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여자가 미안하다며 남친의 전여친이 한국인이라 조건 반사적으로 표정이 나왔다고 한다. 나한텐 유감이 없다고 하는데 이 상황이 불편한 남자의 표정과 입장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의 대화는 오래 가지 않고 끝났다. 정상에서 같은 투어 친구들을 기다리면서 또 다른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다. 바하마에서 온 이 여성은 혼자 온 모양인데 꽤 여유로워보인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카리브해 국가인 바하마 사람을 만났는데 이 친구는 부산에 친구도 있어서 한국 방문 경험도 있다고 한다. 아, 한국인? 익숙해~ 이런 느낌.
하산 후 산장에서 쉬고 있는데 같이 왔던 브라질 커플이 나에게 힘겹게 말을 건다. 스페인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서 말이다. 인터넷도 전혀 안되고 대충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 알고보니 이들은 영어도 스페인어도 못한다. 생각해보니 브라질인이 사용하는 포르투갈어가 아무리 스페인어와 비슷하다고 해도 이들한텐 모국어가 아니고 잘 모르는 두 개의 언어로 투어를 참여하고 있던 것이다. 오히려 배려받고 있는 것은 나였다. 아무튼 영어가 통하는 다른 투어 그룹과 대화하는 나에게 동병상련을 느낀 것인지 다가온 것이다. 어쩐지 유난히 둘만 붙어다니더라. 인터넷도 전혀 안돼서 번역기를 사용한 대화도 불가했지만 어디서 왔는지, 어딜 갔는지, 어딜 가는지 등 아주 제한되고 기본적인 정보만 주고 받았다. 보기 좋은 이 꽁냥꽁냥한 커플은 이 황무지에서 아주 잠깐 인터넷이 가능할 때 나에게 인스타그램 맞팔을 하자고 한다. 어우 좋지. 나중의 얘기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언어가 안 통하나 SNS 상에서는 번역 기능으로 아주 대화가 잘 됐다. 브라질 갈 때 다시 연락해봐야겠다.
다음 행선지는 라파스 근교의 달의 계곡이다. 이 투어의 동선이 얼마나 비효율적이냐면 서울 수도권으로 예를 들었을 때,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투어를 시작해서 동쪽에 가평에 높은 산 (예를 들면 화악산) 정상을 갔다가 서울 서북쪽 구파발 근처의 북한산 계곡을 간 격이다. 심지어 도로는 도심지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포장에 당연히 수도권 순환도로 같은 고속화도로도 없고 서울 사대문 안의 길을 다시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가야 하는 꼴이다. 그만큼 한 방향에서 효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그래도 여행이니 어쩌겠는가. 이 마저도 즐겨야지. 달의 계곡은 화산활동으로 인해 파생된 지형이다. 우리나라 제주도나 한탄강, 일본 큐슈 섬 아소산 등이 그렇듯 화산지형은 늘 수려한 자연 경관을 만들어준다. 달의 계곡은 사진에서 보다시피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이 아닌듯 하다. 그만큼 우리처럼 찾아온 관광객이 많다.
오가면서 가이드 페드로와 볼리비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투어에 유일한 영어 사용자. 소중해. 볼리비아는 내륙국가이다.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해 해안 지역을 모두 빼앗겼으니 남미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뒤에 라파스에서 또 다루겠지만 정말 남미 내 타국가들과의 육안으로 보이는 경제적 차이가 극심하다. 페드로는 최근 볼리비아의 풍부한 천연자원에 대해 정부가 미국, 중국 등 강대국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는 것이 불만이지만 딱히 대안이 없다고 한다. 거대한 대륙과 그 안의 안데스산맥으로 고립된 이 나라는 그래서 나처럼 이렇게 볼리비아를 찾아온 사람들이 너무 고마운 것이다. 볼리비아인들은 조국의 낮은 국력으로 인해 해외여행이 크게 제한된다고 한다. 경제적 격차로 인한 불리한 환율에 더불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나라도 크게 제한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솔직히 말하면 볼리비아인들은 정말 순수하고 촌스럽다. 또 그것이 그들만의 매력이다. 외국자본에 영향을 덜 받은 국가나 지역들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이다. 몇 년 전 필리핀 타클로반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느낀 느낌과 유사하다. 이 모습 그대로 보존되길 바란다면 아주 이기적인 생각이겠지.
지루했던 달의 계곡 투어를 마치고 라파스 시내로 돌아온다. 우린 각각 작별인사를 하며 서로를 떠나보냈고 각자의 일정으로 복귀한다. 여느 여행이 그렇듯 인연이 되면 또 보겠지. 혼자 여행온 자의 축복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해주고 공유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지레 겁먹거나 마음을 닫고 있었다면 알 수 없었을 큰 즐거움. 약간 남은 체력으로 라파스의 밤을 좀 더 즐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