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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잉카의 '마추픽추'

정작 잉카인들은 존재조차 몰랐던 비밀요새

by 이몽 Mar 23. 2025

20250215 (4일차)

남아메리카 - 페루 - 아구아스 칼리엔테스 - 마추픽추



비가 온다. 계속 온다고 한다. 어휴 마추픽추는 날씨가 다 한다는데 조졌다 이거. 마추픽추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날씨에 대해 걱정 반 불평 반 얘기하며 우연히 유럽에서 온 커플과 친해졌다. 둘은 암스테르담에서 거주하고 남자는 불가리아, 여자는 루마니아인이라고 한다. 나이는 안 물어봤지만 20대 중반 정도로 보였고, 다른 대륙의 남반구까지 여행을 올 정도에 애정행각을 봤을 때 꽤나 깊은 관계인 듯했다. 둘은 성격도 매우 긍정적인 사람으로 누구나 좋아할 호감상이었다. 유럽에 와봤는지, 암스테르담과 루마니아, 불가리아에 와봤는지 물어본다. 과거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을 여행했던 추억을 공유해주니 신기해하며 본인들도 내년엔 한국에 갈 계획이 있다고 한다. 대충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궁금해하는 포인트는 늘 신선하다. 한국 여행 최적기. 나는 봄의 4~5월과 가을 9~10월을 추천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모든 식당이 고기를 직접 굽는지 신기해한다. 또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 그렇게 하이킹할 산이 많다는 것에 또 놀란다. 약 1천 년의 수도였던 역사를 가진 도시인 것에도 흥미를 보인다. 세계적으로 이런 복합적인 콘텐츠를 가진 도시는 흔치 않은 게 새삼 자랑스럽다.


마추픽추 주변도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마추픽추 주변도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도착한 마추픽추는 비는 거의 그쳤지만 안개가 깊다. 가이드는 걱정하지 말란다. 안개는 곧 싹 걷힐 테니. 어제 성계투어의 가이드와 분명 다른 사람인데 정부의 공인을 받은 두 페루 현지인 가이드는 잉카 유적과 그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무래도 정부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요건 중에 하나인가. 아시아와 유럽 등 구대륙과 단절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한 조상들의 기술력과 유산에 상당한 경외심을 보여준다. 좀 과하긴 하지만 이것도 또 재밌는 포인트긴 하다. 소위 잉카뽕에 취한 몇몇 여행자들의 질문은 그를 더욱 즐겁게 한다. 문제는 대부분 남미 여행 전 공부한답시고 유튜브에서 봤던 내용들이다. 뭐가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장도 섞인 듯 하다. 아... 예상된 결말은 노잼인데, 안개가 걷혀 온전히 드러난 마추픽추가 나에게 약간의 감동도 주지 못하면 어떡하지 싶다. 안개가 걷힐 때까지 가이드가 시간을 끄는 것인지 올라가는 층마다(계단식 구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층으로 구분돼있다) 설명이 길어진다. 거의 맨 윗층에 도달했을 때인가, 귀신같이 안개가 싹 걷혔다. 뭐가 됐든, 가이드의 타이밍과 인내심에 박수를 보낸다.


한 눈에 들어온 마추픽추. 오히려 나는 안개가 함께하는 것이 더 좋다.한 눈에 들어온 마추픽추. 오히려 나는 안개가 함께하는 것이 더 좋다.

안개가 걷힌 마추픽추는 신비했다. 오히려 남아 있는 안개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유난히도 가파른 마추픽추 근처 산봉우리들 사이에 있는 마추픽추의 위치 또한 신비하다. 그동안 보았던 사진과 영상과 너무 똑같아서 식상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명소는 명소다. 개인적으로는 마추픽추 자체보다 마추픽추를 둘러싼 주변 산봉우리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안개가 한 몫을 한 것 같은데 정말 보자마자 영화 아바타가 떠오를 정도로 신비했다. 동양권으로 따지면 마치 무릉도원 같은 느낌이라 할까. 유난히도 가파른 산봉우리가 이국적도 아닌 외계 행성의 형상이랄까. 이곳은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잉카인들은 생전 존재조차 모르는 곳이었다. 잉카 지도층의 비밀기지이자 요새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싶으면서도 씁쓸함도 함께 한다. 결국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랜 세월 산 속 깊숙히 숨어서 남아있었겠지.


와이나픽추 정상. 죽기 딱 좋은 가파름이다.와이나픽추 정상. 죽기 딱 좋은 가파름이다.

마추픽추 내 벽돌로 지은 수많은 건물들은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신전과 창고, 숙소 등등에 또 조형물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의미, 천문대와 해시계 등 말 그대로 잉카 고위층 기술+종교의 집합체였다. 이러니 고고학자들이 환장할 수밖에. 희한하게도, 통용된 문자가 없는 잉카 문명은 기록된 역사도 없고,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과 흔적들은 고고학자들의 엄청난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또 발굴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면 언젠가 잉카 역사책이 발견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그랬으면 좋겠다.) 마추픽추 내부 전체를 도는 서킷을 마무리하고 난 무리와 떨어져 미리 준비한 다른 트랙으로 따로 떠난다. 이 트랙은 마추픽추 전경 사진에서 뒤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인 '와이나픽추'의 정상을 오르는 것이다. 마추픽추 구간보다 약 300m 높게 위치한 정상은 서울에서 인왕산, 북악산 정도의 높이지만 시작점 자체가 2,500m가 넘는 고도에 사진에 보이다시피 길이 있나 싶을 정도로 매우 가파르다. 오히려 좋아. 등산할 맛 난다. 확실히 3,500m 고지의 쿠스코에 있다가 1천m 아래로 내려오니 호흡은 훨씬 순조롭다. 올라가는 길에 어제 성계투어에서 만났던 두 친구를 또 만났다. 이것 참 이정도면 인연 아닌가. 이따 점심이나 같이 하기로 한다. 35분 만에 도착한 정상. 생각보다 좁고 마치 북한산의 여러 봉들처럼 화강암으로 좁게 구성되어 있다. 가장 기대했던 와이나픽추 정상에서 바라본 마추픽추 전경은 아쉽게도 엄청난 안개로 인해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마추픽추 전경을 처음 구간에서 본 것에 운을 다 썼나보다.


하산하는 길에 나랑 비슷한 속도의 한 외국인과 말동무가 되었다. 85년생인 이 캐나다 국적의 여성은 홀로 페루에 왔다고 한다. 자신은 남미 원산지의 식물인 코카나무의 잎으로 할 비즈니스를 찾고 있는데, 나에게 코카잎 몇 개를 주며 씹어보라고 한다. 씹은 다음 삼키지 말고 아랫니 치아 옆에 놔두라고 한다. 고대 잉카인들은 이 방식으로 고산병을 이겨냈다고 한다. 그녀는 베지테리언이었다. 소개해 준 쿠스코의 맛집은 나중에 보니 모두 비건들을 위한 곳이었다. 그녀는 또한 명상을 즐기고 40대 초반의 빛이 나는 솔로 생활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보통 외국에서 여행온 외국인을 만나면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 말을 건다. 그들도 타지에서 친구를 만드는데 거부감이 없고, 또 대부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유럽 출신이 많고 한국에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대화가 꽤 수월한 편이다. 그런데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 영미권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과 영어로의 대화는 상당한 심적 부담이 생긴다. 어휘 수준도 다르고 관용적 표현도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역별 발음의 특성까지 더하면 뭐 말할 것도 없다. 근데 이 친구는 다르다. 뭔가 부드럽게 말도 잘 통하는 느낌이었고 부담이 없었다. 알고보니 본인의 새어머니는 한국사람이고, 한국인 남자친구도 사귀어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나의 레벨에 맞춰서 대화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역시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다. 하산 후, 여행에서 만난 사이답게 쿨하게 빠이하고 마추픽추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번 남미 여행의 큰 숙제 중 하나인 마추픽추가 끝났다. 이제 엉망진창인 도로와 함께 쿠스코로 복귀해 내일은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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