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서 마주한 어린 시절 서울의 모습
20250217 (6일차)
남아메리카 - 볼리비아 - 라파스
이제 페루를 떠나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향한다. 콜롬비아 항공사인 아비앙카 비행기에서도 또 새로운 사람과 만났다.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닮은 옆자리의 볼리비아 50대 아저씨와 그 주위 무리들은 진짜 나르코스에서 보던 마약상들 처럼 생겼다. 당연히 편견이겠지만 넷플릭스가 이렇게 무섭다. 아 최소 운반책이려나, 마약상이면 이런 이코노미 비행기는 안 탈텐데, 현금을 어디다가 뒀지 등 별 생각이 다 들면서 경계심이 생겼다. 그런데 웃긴 것은 그도 나를 살짝 경계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나에게 쿠스코가 어땠는지 물어본다. 그리고는 혹시 중국인이냐고 아주 조심스럽게 또 물어본다. 꼬레아노 라고 말하니 엄청난 화색을 띄며 갑자기 양손으로 악수하며 너무 잘됐다고 한다. 뭐가 잘 된건지는 모르겠다. 중국인이 아니어서 좋은건지, 한국인이라서 좋은건지. 아무튼 좋아한다. 그러더니 북한 사람 아니지? 라는 농담을 하며 크게 웃는다. 이제 남한 북한 출신을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은 외국인 사이에서도 무식한 질문인가보다. 듣던대로 볼리비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순수한 느낌이다. 라파스가 기대된다.
쿠스코 - 라파스 간의 유일한 이 아비앙카 항공편에는 6~70 년대생의 중국인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대다수였다. 라파스 국제공항의 입국수속 행정처리는 개발도상국 답게 답답했는데 본의 아니게 들리는 몇몇의 한국어 대화들은 어느 줄이 가장 빠를까 심각한 토론이었다. 어차피 단체관광이라 다 같이 가야 해서 빠른 줄이 큰 의미가 없는데 참 한국인 답다고 생각이 들었다. 중국인들의 대화는 이해할 수가 없으니 행동으로만 보였는데 아무렇지 않게 새치기하거나 목소리가 큰 정도. 오늘도 편견 하나를 추가한다.
힘겹게 탈출한 공항을 나와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부른다. 어제까지의 페루에서는 우버를 아주 편하게 사용했는데, 여기는 인드라이브(inDrive)라는 앱을 사용한다. 앱의 사용 방식이 워낙 독특했는데 또 꽤나 효율적이라 비즈니스적으로 참고가 됐다. 방식은 내가 원하는 루트를 어플에 입력하면 출발지 근처에 드라이버들이 각각 금액을 입찰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기사님의 사진, 성명, 평점, 차종 그리고 입찰금액이 뜨는데 이 중 내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하면 된다. 국내에서 중고차를 헤이딜러를 통해 매각해본 사람은 대충 시스템에 대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런데 인드라이브 어플의 또 다른 특이점은 현금 결제라는 것이다. 볼리비아 내국인만 사용할 수 있는 QR 등의 선택권도 있었지만 우버 등과 같은 기존 택시 어플처럼 신용카드는 사용이 불가하다. 볼리비아에서는 신용카드 결제가 거의 불가한 점을 봤을 때, 이해가 되긴 한다. 그리고 일부의 우버 사용도 가능하긴 한데 우버와 동일 구간을 가격비교 해보니 인드라이브가 2~30% 더 저렴하기도 하다. 인드라이브 어플의 수익모델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꽤 인상적이었다. 어느 곳보다 자본주의와 멀어 보이는 이 국가에 가장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이라니. 아이러니 하다.
쿠스코보다 약 1천m 높이 있는 라파스에 도착하고 또 약간의 두통이 느껴진다. 쿠스코에서 대충 적응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역시 더 높은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라파스는 쿠스코와 비슷하게 분지형이고 구성도 비슷한데 그 형태가 매우 극단적이다. 구글맵을 지형 버전으로 보면 알겠지만 아주 특이한 형태이다. 볼리비아는 국력이 약해 칠레로부터 해안가 도시를 뺏겨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 특유의 비자발적 고립성을 띄는데 행정수도인 라파스도 공교롭게 그런 형태가 되어버린 셈이다. 여기서 고립성이란 아무래도 교통과 무역의 제한으로 인한 경제적 문화적 상대적인 낙후성을 의미하겠다. 그런데 이 특유의 고립성이 역설적이게도 내가 라파스를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되어버렸다.
라파스는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추픽추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오후 시간에 돌아다닌 라파스의 시내는 내가 아주 어릴적 엄마 손을 잡고 보던 90년대 초중반 서울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다. 어두운 시멘트 색에 물때가 묻어있으면서 길거리에 늘어져 있는 잡지외 신문을 파는 노점상, 휴대폰게임이 아닌 공놀이를 하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 어딘가 촌스러운 패션들, 신호등이 있지만 무단횡단하는 사람들, 언젠가 영상에서 보았던 쿠바 아바나의 허름한 올드카들. 이 느낌이 어느 정도였냐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홀로 덩그러니 과거로 와 공간적으로도 시기적으러도 완전한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이 상황을 인지한 트루먼쇼라고 해야 하나. 그 와중에 산 프란시스코 교회 광장 건너편에 있는 건물 옥상 위 커다란 삼성 갤럭시 25S AI 광고판은 마치 꿈속에서 고증 오류를 발견한 듯한 이질감을 주었다. 그런데 이건 부정적인 충격이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묘하게도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이 도시가 어떻게 부정적이 될 수 있을까. 이 비슷한 느낌을 비교적 최근에도 서울에서도 느낀 적이 있다. 업무차 방문했던 강서구의 대한항공 본사와 강원도와 동남쪽 방향을 향하는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말이다. 단군 이래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나라는 재건축을 사랑해 과거의 것을 쉽게 놔두지 않는다. 그래서 라파스가 나에게 이런 느낌을 더 강하게 준 것이 아닐까. 이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 갔던 길을 한 번 더 돌아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