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쫑 Apr 13. 2023

이데올로기의 흔적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 베를린

베를린 장벽과 현대 예술의 도시

    베를린에 1년 만에 다시 왔다. 작년 4월 베를린에 왔을 때 베를린 장벽을 그대로 존치하고 예술로 승화시킨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와 아내는 독일에 거주하는 둘째 딸과 함께 예술기행을 목적으로 베를린의 여러 갤러리를 방문하였지만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따라 달려보려는 나만의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체류기간이 짧은데다가 베를린 장벽이 정확히 어디에 세워져 경계를 이뤘는지 정보도 부족했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베를린 장벽도 기억의 편린으로 또는 관광상품으로 존재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 일정이었다. 암튼 베를린 하면 나는 베를린 장벽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것은 젊은 시절 이데올로기와 현실에서 고민했던 나의 어쭙잖은 고뇌의 시간과도 무관치는 않다.  

베를린 장벽의 이스트사이트 갤러리와 형제의 키스

(형제의 키스-1979년 동독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와 동독 서기장 호네커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영원함을 바라는 퍼포먼스성 키스 한 것을 1,316m 베를린 장벽에 그린 그림으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21개국 118명의 화가들의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서기 귄터 샤보프스키가 기자회견에서 이탈리아 기자의 국경 개방은 언제하냐는 질문에 별생각 없이 던진 '지체 없이 즉시'라는 한마디 말실수로 허물어졌다. 이 기사를 전 세계 언론이 긴급 속보로 타전하며 수많은 동서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에 몰려들어 장벽을 기 시작했다(위키 백과 인용)

    일주일 베를린에 머무를 계획인 나는 작년보다는 한껏 여유로운 시간을 갖자고 했다. 도착 첫날 호텔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내일 아침 일찍 달리기 위한 코스 결정과 날씨 체크. 어느 도시던 처음 가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도시 전체를 일별하는 달리기다. 4월 첫째 주 둘째 주 베를린 날씨는 우중충한 날씨가 대부분이고 비 예보도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의 달리기에 약간의 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일 이른 아침 달리기로 결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일기예보가 맞다는 듯 비가 흩뿌리고 있다. 하루 종일 비 소식에 오늘 런닝은 10km 정도로 브란덴부르그문을 지나 박물관섬까지 베를린의 중심가를 달리기로 했다. 호텔에서 브란덴부르그문까지 가는 길에 티에르가르텐 공원을 가로질러 달렸다. 공원의 흙길을 달리니 운동화가 금방 젖었다. 비 올 때 가장 불편한 것이 운동화가 젖는 것이다. 운동화 양말이 젖으면 축축한 느낌에 발이 미끄러지기도 하고 젖은 상태로 오래 달리면 피부 마찰로 인해 물집이 잡히기도 한다. 비 올 때 장거리는 이런 발의 컨디션 때문에 더 힘들다. 그래도 달려야 하니 되도록이면 젖은 운동화나 옷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상책이다. 공원을 빠져나오니 베를린 전승기념탑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브란덴부르그문까지는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베를린 전승기념탑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온몸이 비에 젖었다. 빗속이라 핸드폰의 구글맵을 확인하기 귀찮아 머릿속에 기억하는 길로 달렸다. 하지만 나는 바로 우회전해서 달려야 했는데 직진해서 달리며 코스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승기념탑에서 브란덴부르그문 그리고 박물관섬까지 도로는 일자로 이어진 도로기에 그냥 짐작으로 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계속 달려도 브란덴브루그문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가슴에 차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 구글맵을 켰다. 엉뚱한 길로 한참을 달린 것이었다. 비만 오지 않아도 이 정도 알바(마라톤에서 주로를 이탈하여 더 달리는 걸 이렇게 말한다)는 문제없는데 비가 계속 뿌리니 난감했다. 이제 수정한 코스로 빨리 달려야 하는 수밖에 없다. 브란덴부르그문 방향으로 빠르게 달렸다. 알바로 인해 예상되는 거리가 7km 늘어났다. 주변 사진 찍는 것도 포기하고 빠르게 달렸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국가의회의사당. 해외여행을 하기 전 나는 항상 그 나라 역사와 문화에 대해 먼저 공부를 한다. 1933년 2월 국가의회의사당이 불났던 적이 있다. 당시 집권당인 나치당이 독재 체제를 완성하기 위한 모략으로 저지른 사건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사실이다. 역사를 알고 보니 다르게 보인다. 이른 아침의 국가의회의사당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의연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국가의회의사당

    국가의회의사당을 끼고돌아 조금만 가면 브란덴부르그문이다. 이곳은 항상 사람이 붐비는 베를린의 랜드마크다. 나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브란덴부르그문을 보고 싶어 아침 일찍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달리며 얻는 행복이 이런 걸까. 인적이 없는 브란덴부르그문. 친구와 마주 앉아 얘기 나누는 기분이다. 나의 얘기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비도 잠시 그쳤다. 이 문은 1788년 프로이센의 국력을 과시하며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지었다. 문 꼭대기의 그리스 여신 4두 마차는 마치 나를 향해 질주하듯 용맹을 뽐내고 있다. 문을 받치고 있는 12개의 기둥은 독일 통일의 역사를 보여 듯이 단단하게 상단을 지탱하고 있다. 동서독 시절에 브란덴부르그문을 중심으로 베를린 장벽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역사의 현장, 그 감흥을 두 발로 달려와 느끼는 건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느끼는 감정이나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이런 흥분이 나를 달리게 만든다.

브란덴부르그문, 그리고 나

    이제 일직선 도로를 따라 앞으로 달려가면 된다. 여기서부터 1km는 베를린 대표적인 명소로 낮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베를린 분서기념관, 베를린 왕세자궁, 훔볼트대학교 등...

    평소 북적이는 거리를 혼자 뛰니 신이 난다. 이리저리 갈지자로 뛰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좌우 경치를 옆에 끼고 달렸다. 앞에 박물관섬이 보인다. 1824~1930년 사이 지어진 고풍스러운 5개의 박물관이 모여있는 곳인데 섬으로 표현한 것이 재밌다. 먼저 눈앞에 보이는 베를린돔을 돌아 신고전주의 건물풍인 베를린 구박물관을 향해 달렸다. 아름다운 건축미에 흠뻑 빠져 비 오는 것도 잊었다.

베를린 돔과 베를린 구박물관

    구 국립미술관은 아담하면서도 정교한 건축물이다. 정원을 지나 미술관의 아름다움에 빠져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걸었다. 이것이 이 건축물에 대한 나의 예의인 듯. 좌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도 하고. 정원이 그런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듯이 가지런히 정돈된 길을 서서히 달려 빠져나왔다.

구 국립미술관

    가장 안쪽의 페레가몬 박물관을 돌아 나온 나는 이제 호텔로 향했다. 여기까지 달린 거리가 11km. 온몸은 땀과 빗물로 범벅이다. 끈적거리는 불편함은 달려야 잊는다. 몸이 힘들면 몸의 거추장스러운 것은 잊게 된다. 그래서 나는 빨리 달렸다. 힘이 좀 들 정도로. 힘들게 달린다는 것은 빠르게 달린다는 것이니 기록도 단축되고 좋은 거다.

    브란덴부르그문을 나와 좌측으로 돌고 다시 우측으로 돌아 티에르가르텐 공원을 끼고 계속 달리면 호텔이다. 그중 한 곳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브란덴부르그문을 빠져나오면 바로 만난다. 이곳은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이곳에서는 천천히 걸었다. 높낮이가 다른 돌이 세워진 틈을 걷다 보면 마치 내가 유대인수용소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무거운 뭔가가 짓누르는 거 같아 걷는 것조차 힘들게 만드는 곳이 이곳이다. 2,710개의 미로 같은 추모비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을 처연하게 울부짖는다. 이건 작품이 아니다. 이건 예술이 아니다. 나는 알 듯 모를듯한 말을 내뱉으며 이곳을 빠져나왔다.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무거웠던 마음에 날씨까지 스산하니 몸에 오한이 느껴졌다. 따뜻한 커피가 생각났다. '그래 빨리 달려 커피 한잔하며 쉬자'. 공원 옆 도로를 끼고 질주하는데 한 무리의 마라톤 동호인들이 달리고 있다. 나는 '할로(독일식 인사)'하며 인사하고 그들과 함께 달렸다. 독일에서 달리미들과 함께 달리는 추억이 남달랐다.

독일의 달리미들

    호텔이 저 앞에 보이는데 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힘을 다해 단거리 달리듯이 질주하여 커피숍에 닿아 아침 달리기를 마쳤다. 커피숍에 들어가니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커피 향이 온몸을 감싼다.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목에 넘기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생긴다. 이런 맛에 뛰는 거다. 나는 오늘 달리기에 흡족해하며 만족감에 젖었다. 남들이 흠뻑 젖은 내 모습을 어떻게 보는지는 상관없다. 궂은 날씨였기에 인적이 없어 오히려 더 혼자만의 기분을 느끼며 달린 베를린의 아침이었다. 베를린 역사의 현장을 더듬으며 달렸던 빗속의 시간들. 프레첼을 한입 베어 물고 커피를 마시니 출출했던 배가 금방 포만감에 찬다. 포만감이 머리에 전달되니 오늘 달리며 느꼈던 감정, 눈에 들어왔던 풍경들이 다시 온몸에 전달된다. 베를린의 커피는 향기와 더불어 역사와 예술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커피와 프레첼
17km 런닝 코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