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이르지만 한 해 마무리를 마라톤 대회 참가로 하기로 했다. 나름 알차게 보낸 한 해였다. 퇴직한 지 꽤 오래됐는데 바쁜 생활이었다는 건 무척 행복한 한 해였다는 의미기도 하다.
마라톤 대회 장소는 올림픽공원. 집에서 8호선 전철로 가깝다. 이른 아침에 잠이 깼다. 된장국에 밥을 먹고 발에 테이핑을 하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며칠전만 해도 따스한 날씨였는데 아침 기온이 -3도에 약간의 바람도 있다. 이번에는 단단히 옷을 입고 달리기로 했다.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 나름 기록을 경신해 보자는 욕심을 갖고 있었기에 추위를 느끼며 달리는 건 안 된다. 이런 날씨는 달리고 나서 땀이 좀 난다고 온몸에 열기가 올라오는 건 아니다. 오랜만에 아내가 골인 지점에서 나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오늘 예상 기록 숫자를 머릿속에 그렸다.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몇 시쯤에 골인 지점에서 기다리면 되냐고 묻는다. 10시 40분에는 와야 할 거라며 골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했다. 10시 40분의 의미는 9시에 출발하여 1시간 40분 조금 넘어서 골인할 거라는 암시였다. 그만큼 이번 대회에서 나는 기록을 경신하며 올 한 해를 화려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이런 기록을 내기 위해서는 1km를 무조건 5분 이내에 달려야 한다. 사실 이건 나의 평소 기록으로 보면 무모한 짓이다. 하지만 대회에 나가면 다른 주자와의 경쟁의식으로 기록이 빨라지기는 하기에 죽기 살기로 달려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연습을 더한 건 아니었다. 그저 올해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내년에 좋은 일을 기약하고 싶은데 이번 마라톤을 모멘텀으로 삼고 싶을 뿐이었다.
엄청난 사람들이 출발점에 서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모두 즐거운 모습이다. 근데 긴장감을 찾을 수 없다. 9시 출발인데 왜 출발 안 하지 의아해하며 출발 아치의 대형시계를 보니 풀.하프코스 시계가 7분 30초를 지나고 있다. 아차! 내가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앞에선 풀. 하프코스 주자들이 출발하고 지금 같이 서 있는 주자들은 10km 주자들. 할 수 없이 10km 주자들과 함께 출발했다. 앞선 주자들에 비해 8분 늦게 출발한 것이다. 2.5km까지 10km 주자들과 같이 달렸다. 그러다 나 혼자 풀.하프코스 주로로 빠져 달렸다. 눈앞에는 주자들이 한 명도 안보였다. 순간 나는 생각했다. 8분 앞서 달린 주자들을 앞서가는 재미로 기록을 단축해 보자고. 5km 지점에 닿으니 천천히 달리는 주자들이 보이고 곧 2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가 보였다. 나는 그들을 앞질러 달렸다. 몸에 지닌 핸드폰에서 km당 4분 56초라는 안내음이 들렸다. 나는 계속해서 앞선 주자를 추월하며 달렸다. 반환점을 앞두고 맞은편에 2시간 페이스메이커가 지나간다. 저 페이스메이커만 제치면 나는 1시간 50분에 골인하는 데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좀 빠르게 달려 그를 제치고 나는 1시간 50분 페이스메이커를 찾아 앞으로 질주했다. 15km 지점을 지나서도 나의 속도는 04:57/1km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렸다. 그동안 하프코스 달릴 때 후반부 지나면 '두 시간 안에 완주는 하니깐' 하는 안이함에 급격히 속도가 늦어지곤 했는데(정확히는 힘들어 천천히 뛰고 싶은 마음을 받아들인 거) 이번엔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다. 1시간 45분 만을 그릴뿐이었다. 결심하고 도전하면 어느 정도는 이뤄진다. 이렇게 달린다고 죽지는 않는다. km당 4분 57초의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두발을 힘껏 내쳤다. 18km 지나서 부터는 지친 기색의 많은 앞선 주자들을 앞질렀다. 하프코스를 1시간 45분에 뛰는 건 나에게는 꿈의 기록이다. 골인 지점을 얼마 안 남기고 핸드폰 런닝앱에서 1km 4분 58초라고 말한다. '5분을 넘기면 안 된다. 5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두발은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앞으로 내디뎠다. 마지막 골인 지점까지 나는 한사람 한사람 제치며 라인을 밟았다.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아내는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눌렀다.
라인을 넘고 나는 아내에게 외쳤다. '1시간 45분이야 1시간 45분'. 나는 몹시 흥분 상태가 되었다. 이런 기록이 가능하리라고 실제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50대 초반부터 마라톤을 시작하여 이제 60대 중반이다. 누구는 나이 먹으며 기록에 연연하지 말고 건강을 위해 달리라고 한다. 나이 먹어 기록이 쳐지는 건 당연한 거니 욕심부리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마라톤을 통해 역동성을 찾는 사람이다. 역동성에는 부여되는 동기가 있다. 나아지는 기록(퇴보하는 기록에 뭔 동기부여가...)을 보며 꿈을 크게 갖고 생활 속 나의 도전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기록은 나에게는 폭포수다. 잔잔하게 흐르는 개울은 싫다. 요즘은 전자칩을 런닝화에 붙이고 달리기에 골인하면 바로 핸드폰으로 기록이 전송된다. 아내의 환대를 받으며(사실 오늘 아내도 관객이다. 오늘 기록을 의식하며 자랑할 상대가 있어 좋은 기록을 달성했는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보니 1:46:03. 3초 초과했다. 그럼 어때!! 나는 아내에게 나를 자랑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 남편이 어딨지?' 호기롭게 내 가슴을 두드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올림픽공원 근처 순댓국밥 집으로 걸으며 나는 연신 나를 칭찬했다. 걸으면서도 기록에 대한 흥분이 가시질 않아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래서 오늘의 흥분을 더 간직하고 싶어 이렇게 몇 시간 뒤 브런치 글도 쓰는 거고.
사실 나보다 잘 뛰는 60대 마라토너도 많다. 하지만 오늘 나는 나를 칭찬하고 싶다. 이 기록은 나에겐 불가능의 기록이었다. 오늘 내가 이런 기록을 낸 건 내년을 즐겁게 준비하고자 하는 맘을 담고 있어서 그런 거다. 올 한 해 나는 나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의미 있는 시간들, 가치 있는 시간들. 내가 이룬 것들이 소소한 것일지라도 행복이 충만한 한 해였다. 내년에 나는 무엇을 할지 모르겠다. job은 없고 시간은 많다. 결국 내가 삶의 가치를 찾아 뭔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막연한상상만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미친 듯이 달렸다. 이렇게 달리면 내년에 뭔가를 못하겠나 하는 심정으로.
달리기를 많은 사람들이 즐기지만 꾸준히 달리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힘든 운동이기도 하지만 꾸준함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무엇보다도 달리며 목적성 있는 삶, 새로운 도전에 동기부여의 이유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달리며 동기를 부여한다. 특히 극한의 달리기에서. 나는 나이 먹어서도 샘솟는 열정으로 사고한다. 이 모든 것이 마라톤 덕분이다. 하프코스 10년 전 기록에서 12분이 당겨진 오늘 기록, 나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당신은 체력이 뛰어나고 몸도 좋은가 보다라고. 하지만 난 보통의 체력에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다. 강철 체력은 더더욱 아니다. 뛸 때마다 힘들어 그만 뛰고 싶은 건 똑같다. 남들하고 좀 다른 것은 힘들다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쉬지 않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달린다는 게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있는 원동력이다. 내가 오늘처럼 기록을 의식하며 도전하며 달리는 이유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