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이 참가한 마라톤 대회
새벽 4시에 잠을 깼다. 오늘은 코리아오픈레이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날이다. 뚝섬유원지에서 출발하여 한강변을 달린다. 오늘 참가는 남다른 의미가 있어서 그런지 더 잠이 올 거 같지 않았다.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내를 물끄럼히 바라봤다. 아내가 오늘 완주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오늘 대회는 아내와 사위, 딸 이렇게 온 가족이 참가한다. 10km. 나는 하프코스.
50대 초반부터 달리기 시작했으니 내가 마라톤을 한지도 꽤 오래됐다. 그간 아내는 제발 하프코스만 달리라며 풀코스나 100km 대회 참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극한의 대회 참가를 통해 활력을 되찾곤 했었기에 그런 미련을 쉽게 버리진 못한다. 그런 가운데 아내가 마라톤의 매력을 느낀다면 그런 말을 안 하겠지 하는 생각에 대회 참가를 여러 번 권유했었다. 아내도 나이가 들면서 건강을 무척 신경 썼다. 평소 걷는 운동을 많이 했기에 기초 체력을 갖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걷는 것과 달리는 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다르다. 아내는 내 설득에 드디어 대회 참가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딸과 사위도 끌어들였다. 평소 운동을 즐겨하는 딸과 사위는 흔쾌히 ok.
아내와 일주일에 한 번씩 뛰며 두 달간 연습했다. 아내는 10km 제한시간인 1시간 30분 안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힘들면 중간에 걸으면 된다며 다독였다. 사실 1km를 8분 30초~9분에 뛰면 되지만 쉬지 않고 뛰는 건 초보자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아내는 연습에 진지했지만 1시간 30분은 자기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내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 필요했다. 매번 기록을 재며 빨라지는 자신을 보며 아내는 달리는 거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그건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매주 연습을 했지만 10km 완주를 두 번 밖에 못했다. 연습하다가 미리 질려 대회 참가를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강요하지 않았다. 아내는 도리어 큰딸을 걱정했다. 연습해야 완주할 수 있다며 같이 완주하자고 했다. 사실 사위와 딸은 주중에는 회사일로 늦게 집에 오기에 연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영과 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편이라 나는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그즈음 독일에 사는 작은 딸도 거리를 늘리며 달리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작은 딸은 엄마를 응원했다. 그날 자기도 10km 뛰겠다고 했다. 드디어 온 가족이 함께 뛰는 것이다 2025년 3월 8일. 나와 아내, 사위와 큰딸, 그리고 작은 딸.
날씨는 맑지만 쌀쌀함이 조금 느껴졌다. 9시 출발이니 너무 가볍게 입어서는 안 된다고 어제 미리 말했던 참이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차를 몰고 사위와 딸을 태우고 뚝섬유원지 대회장에 도착했다. 8시인데 주차장은 차량으로 가득했다. 간신히 구석 한자리를 찾아 주차했다. 주차장에서도 워밍업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화장실. 약간의 쌀쌀함이 느껴지니 화장실부터 찾게 된다. 여자 화장실의 줄은 꽤나 길었다. 가볍게 뛰며 대회장으로 향했다. 대회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아내는 약간의 흥분을 느끼는 듯했다. 그건 내가 보기엔 결기에 가까웠다. 사위와 딸은 분위기를 즐기는 느낌이구. 출발은 하프코스 먼저 그 뒤를 이어 10km 1시간 이내 주자, 이어서 10km 나머지, 그리고 5km. 내가 먼저 출발하고 50분 주자인 사위, 그리고 아내와 큰딸이 같이 출발. 큰딸은 엄마에게 1km를 8분대로 같이 뛰자고 말했다.
온 가족이 함께 달리는 의미가 남달랐다. 그런데 오늘 나는 나의 기록을 단축해 보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나의 하프코스 최고 기록은 1시간 45분(2023. 11월 대회). 하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한참 늦은 1시간 52분에 들어왔다.
한강변 코스는 나에게는 아주 익숙한 코스다. 강변역 근처에 오래 살면서 뚝섬 방향으로, 구리 방향으로 달렸었다. 기록을 의식하며 익숙한 주로를 달렸다. 1시간 50분 페이스메이커를 줄곧 앞서 달렸다. 7~8km까지 페이스는 1km/ 05:05. 이런 페이스로 최소한 15km까지는 달려야 했다. 하지만 나의 발은 조금씩 느려졌고 14km 지나서 페이스메이커에게 추월당했다. 내 페이스는 반환점을 돌면서는 20초 이상 느려지고 있었다. 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끝장이다. 이런 마음 가짐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그렇게 달렸지만 3km 남겨 두고 페이스메이커는 점점 내 눈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1시간 50분을 포기했다. 하지만 남은 1~2km는 더 처지지 않게 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다리가 무겁지만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나는 골인지점 아치를 보며 웃으며 골인했다. 사위가 연신 스마트폰 카메라로 나를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아내와 큰딸이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숨고를 틈도 없이 아내에게 물었다.
"완주했어?"
"어머님 1시간 17분에 들어왔어요."
옆에서 말하는 사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엥? 뭐여? 진짜루?"
"네 아버님! 이슬이보다 2분이나 먼저 들어왔어요"
나는 큰딸 이슬이를 쳐다봤다.
"엄마가 처음부터 혼자 뛰어나갔어요 아빠! 같이 뛰기로 했는데..."
나는 아내를 살짝 껴앉아 주었다. 아내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완주 메달을 받고 우리 넷은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사위와 딸이 살고 있는 석촌호수 인근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나는 설렁탕보다 두 배나 비싼 꼬리곰탕을 시켰다. 아내와 사위, 그리고 딸에게 한 덩어리씩 나눠주고 싶어서였다. 설렁탕 국물은 우리 가족의 사랑만큼이나 진하고 담백했다. 핸드폰에는 문자로 이미 기록증이 와 있었다. 아내 기록증을 보며 내가 더 신기했다. 첫 출전한 대회에서 아내의 기록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록이었다. 완주도 힘들겠다며 엄살을 떨던 아내를 힐끗 쳐다봤다. 아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나 대단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내는 기쁜 마음에 기록증과 여러 사진을 독일에 사는 작은 딸에게 보냈다. 독일 시간은 새벽 3시 40분이니 서너 시간 뒤에 깨면 볼 것이다. 국물로 속을 채운 후 한낮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왔다. 집에서 샤워하고 한숨 자려고 누웠다. 3시간을 깊은 잠에 빠졌다. 아내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평소 많이 걷고 꾸준히 몸관리 했던 결과다. 내가 잠든 후 아내도 두 시간 정도 잠을 잤나 보다. 잠에서 깨보니 오후 다섯 시. 카톡을 열었다. 독일 카셀 작은 딸의 축하 글이 보였다. 그리고 두 시간 뒤에 다시 보낸 카톡, 작은 딸도 10km를 뛰었다. 앱으로 측정한 기록. 그렇게 오늘 우리 가족은 모두 뛰었다. 즐겁게 뛰었다. 맑은 하늘에는 희망의 구름이 넘실거렸다.
PS : 뛰면서 뒤쳐지기도 하는 게 마라톤이다. 젊은이들이 나를 앞지를 땐 그러려니 하지만 중장년이 앞지를 땐 쫓아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두발이 그렇게 움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다보면 내 페이스가 망가져 후반부 오히려 더 지칠 게 뻔하다. 인내심을 갖고 내 페이스대로 꾸준히 달려야 하는 게 마라톤이다. 기록은 연습한 만큼만 나온다. 마라톤 대회는 굉장히 많은 사람이 뛴다. 순위를 의식하지 않지만 뛰고 나면 내가 또래 나이에서는 어떤가 궁금하긴 하다. 이번 대회에서는 60대 이상 만의 순위를 별도로 측정했다. 81명 완주(3시간 이내)에 나는 19등. 남자 전체 순위는 907/ 268등. 목표 기록에 못 미쳤지만 순위를 보며 마라톤을 즐기며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시니어라는 자부심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