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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Aug 19. 2019

33_금기를 깨는 삶*

하와이 편


하와이에서 반년, 중미에서 한 달, 서촌에서 반년

생계형 카피라이터가 놀면서 발견한 이야기





하와이 오아후섬 '하이쿠 스테얼스'

본명은 Haʻikū Stairs

예명은 Stairs to Heaven  

천국으로 가는 계단, 3922개


이곳은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과 안테나로 통신하기 위한 비밀기지로 세워졌던 터라, 한 계단도 에둘러가는 법 없이 오로지 위를 향해 직진합니다. 덕분에 최단 시간 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는 반면, 군인이 아닌 이상은 초입부터 허벅지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나지요. 등산용으로 지어진 게 아니다 보니 계단이라기보다는 사다리에 가깝고, 어떤 구간은 경사면이 거의 직각인데다 계단까지 삐거덕거려서 양손으론 난간을 부여잡고 속으론 심장을 부여잡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안전상의 이슈로 1987년부터는 출입구를 닫고 접근금지 팻말을 달았습니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지요. 그들을 잡으려고 입구 쪽에 경비원을 두었는데도 일부는 용케 경비원을 피해서 갈 수 있는 산길을 찾아내 기어코 진입합니다. 누군가에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인 거겠죠.


저는 아니었습니다. 산 정상을 찍는 달성감보다는 산에 오르며 사부삭 사부작 주변 경치를 구경하는 맛에 등산하는 쪽이라서 극기훈련은 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불법인 것도 꺼림칙했고요. 하지만 돌연 이곳에 가겠다고 마음을 바꾼 건 일본인 친구 레이코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바다로 유명한 하와이에서 레이코는 이곳을 '하와이 최고의 장소'로 꼽으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또 가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거든요. 대체 얼마나 좋길래? 저는 궁금해졌고, 곧장 레이코에게 청했습니다. 그 두 번째는 나와 함께 가자고.


집에서 Stairs to Heaven까지 버스 타고 편도 한 시간 반. 버스에 내려서 정상까지 왕복 네 시간. 태양이 뜨거운 시간대를 피하기 위해 새벽에 출발. 저는 중간중간에 먹을 간식을, 레이코는 정상에 도착해서 먹을 점심용 샌드위치를 준비. 새벽 6시 30분. 알라모아나 쇼핑센터 안에 있는 버스정류장. 약속대로 두 명은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55번 버스를 탔습니다.


입구에 도착하자 출입금지 팻말이 붙은 철망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철망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사람이 철사를 끊어 놓은 게 분명해 보이는 작은 구멍이 있더군요. 잠시 망설이고 있던 찰나 20대 초반의 서양인 혼성 멤버 여섯이 우르르 오더니 가방을 잽싸게 개구멍에 밀어 넣고 한 사람씩 몸을 이래저래 구겨서 들어가더라고요. 우리도 몸을 요래저래 구겨서 들어갔습니다. 그다음부턴 레이코의 기억력을 따라 경비원을 피해 갈 수 있는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서 오래전 어떤 이가 다음 사람을 위해 나뭇가지에 묶어놓은 주황색 리본을 이정표 삼아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계단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가파른 계단은 몸으로 오르니 훨씬 더 가팔랐습니다. 암벽등반을 하는 기분이랄까요. 전신은 괴롭지만 마음은 어쩐지 평온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낭떠러지처럼 아찔한 계단 아래로 아름답게 펼쳐진 하와이의 전경. 오르면 오를수록 TV 채널을 돌린 것 같이 확연히 달라지는 풍경. 고소공포증이 심해서 바이킹도 못 타는 주제에 어디서 그런 대범함이 나왔는지 저는 자꾸만 멈춰 서서 아래를 보고 또 보았지요.

  

그래피티로 장식된 옛 군사용 시설

지퍼팩에 넣어온 멜론을 1차로 먹고 과자를 2차로 먹고 사과를 3차로 먹고 사탕을 4차로 먹고 얼음물을 절반 이상 마셨을 때쯤 군사용 시설로 쓰였을 법한 십여 평 남짓의 폐허에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무슨 용도로 사용됐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고철덩어리가 놓여있고 벽면 곳곳에는 그래피티와 만화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지요. 집에서 색색별 락카를 챙겨 왔을 청춘, 가방 속에서 딸그락거리는 락카 소리를 들으며 여기에 올라왔을 청춘, 키득키득 거리며 벽에 칠했을 청춘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그들의 귀여운 흔적들을 카메라에 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침내 정상에 도착.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습니다. 먼저 올라와 천국을 감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레이코와 저는 안테나가 설치된 건물 지붕에 올랐습니다. 뷰가 예쁜 곳에 자리를 잡고선 레이코가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습니다.


성취감 같은 거창한 감정을 느끼며.

 


불법인데 거길 왜 갔어요, 누군가는 핀잔을 줄 수도 있겠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르는 내내 이거 이거 괜히 출입금지 시킨 게 아니네,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게 하나 없다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거길 가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어마어마한 광경과 오랜만에 느껴보는 심장의 두근거림, 서로의 컨디션을 챙겨주던 레이코와의 추억, 정상에서 느꼈던 괜한 성취감, 이 모든 게 가슴이 먹먹할 만큼 소중해서 매사 ‘안전제일’을 최우선으로 하던 금기를 깨길 잘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왔기에 할 수 있는 철없는 소리겠지만요.  


하와이에 간다면 여길 꼭 가봐야 한다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대신, 스스로 그어놓은 금기 하나 정도는 깨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평소엔 절대 못 입던 옷을 입어본다 던 지(저도 입어 보았습니다!), 평소엔 절대 못 하던 메이크업을 해본다 던 지(제겐 노메이크업이 그것이었습니다), 평소엔 절대 못 하던 행동을 해본다 던 지(처음 본 외국인에게 먼저 인사를 해보았습니다), 비키니 차림으로 버스를 탄다 던 지 하는 것들 말이에요.


한국에서 데려온 ‘평소의 나’는 잠시 숙소에 두고, '새로운 나'를 외출시켜 보는 거죠.

한국이 아닌 어딘가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그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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