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사과껍질을 깎아낸 뒤 깍둑썰기하고 웍에 가득히 넣어 젓기 시작했다. 설탕도 붓고, 시나몬 가루도 뿌리고, 버터도 넣고, 전분도 살짝. 검색해 둔 레시피를 따라 했는데 사실 재료들을 얼마나 어떤 순서로 넣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사과 조각들을 쉴 새 없이 휘저어 주느라 팔이 엄청나게 아팠던 기억만 난다. 잠깐 놓을까 싶기도 했지만 최대한 맛있는 애플파이를 먹고 싶은 마음에 손만 한 번씩 바꿔가며 참아봤다. 레시피에서 약간 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신기하리만치 물이 안 나와서 오래도 저었다. 사과는 5개였던가, 5개를 쓰려고 했는데 3개면 가득 차게 생겨서 그만큼만 썼던가. 아무튼 파이 속은 오로지 사과로 가득 채우겠다는 생각으로 듬뿍 잘라 썼다.
크리스마스였다. 남편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만들어 보자며 정한 것이 애플파이였다. 맛있는 사과가 마침 냉장고 서랍 한 칸을 채우고 있었다. 따뜻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딱일 것 같았던 데다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메뉴였다. 갓 오븐에서 꺼낸 따끈하면서도 투박한 애플파이를 크게 한 조각 잘라보는 경험. 기대감과 의욕으로 한 주를 버텼다.
인생 첫 제빵이었다. 상상은 CF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풀풀 날리는 밀가루를 적당히 덧바르며 찢어지지 않게, 하지만 너무 두껍지도 않고 균일하게 반죽을 펴내는 작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제빵을 한 번 해보면 들어가는 설탕과 버터 양에 놀라 빵 먹기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있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너무나도 그런 경고를 많이 들은 탓인지 10g짜리 포션 버터를 몇 개씩 까 넣으면서도 그러려니 했다. 설탕도 이만큼 넣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메뉴를 먹을 때 마법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밥 대신 먹을 거니까!
가장 아마추어다웠던 부분은 격자무늬 만들기. 나중에서야 베이킹 영상을 보면서 씨실 날실 엮듯이, 바구니 짜듯이 한 자락씩 접고 얹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이미 꽤 지친 우리는 흉내만 냈다. 계란물 바르기는 꽤 즐거웠다. 그렇게 인생 첫 애플파이를 구워냈다.
반으로 크게 썰고 큼지막한 사과 과육이 가득 찬 단면도 사진으로 남기고. 어떤 맛일까?
와, 정말 맛있다!
사실 얼마나 달콤했다던가 어떤 향이 강하게 났다던가 하는 기억은 많이 희미해졌는데 정말 맛있다는 인상 하나는 확실히 남았다. 잘 떠올려보니 우선 파이지가 약간 쿠키처럼 단단했고 버터와 설탕이 아낌없이 들어가서인지 그것만 잘라서 먹어봐도 웬만한 과자를 넘어서는 맛이었다. 뜨거운 열 속에서도 과육의 질감을 잃지 않고 시나몬 향을 솔솔 풍긴 사과는 파이지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열량을 걱정하면서 반만 먹으려 했는데 너무 맛있는 나머지 몽땅 먹어버렸다. 밥 대신 먹었으니까, 나중에 먹으면 이 맛을 잃을 테니까.
남편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사진 콘테스트가 있다길래 TV에 4K 모닥불 영상을 띄워두고 애플파이와 함께 찍었다. 소위 참가상에 머물렀다. 아니, 이보다 크리스마스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니.
2020년 크리스마스의 일이었는데 올해 특별한 계기 없이 다시금 애플파이에 엄청난 관심이 생겼다. 이번에는 유명한 베이커리들을 수소문했다. 연남동의 파이집에서 온라인 판매가 열리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소숑 오 뽐므’를 주문했다. 성북동에서 가보려던 베이커리에 드디어 들러 애플 커스터드 파이, 사과 고구마 파이를 샀다. 다 팔렸다는 애플 타르트는 다른 날 들러 한 조각 남은 것을 손에 넣었다. 집 근처 좋아하는 베이커리에서 애플파이를 배달 주문했다. 걸어서 왕복 30분이라 다녀올 수는 있지만 바로 받아 따뜻한 버전으로 제대로 먹어보고 싶었다. 프랑스에서 냉동으로 수입하는 애플 타르트도 주문해봤다. 궁금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았던 애플파이도 적시에 선물을 받아 맛봤다.
모두 맛있었고, 어느 정도 각각의 특색도 파악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만든 애플파이의 맛이 그 모든 파이를 통틀어 최고였다.
아직 유명하다는 그 집도 못 가봤고, 서울 밖의 그 베이커리도 가봐야 해서 판단할 단계에 완전히 이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구매한 베이커리에서도 갓 구운 애플파이를 먹어봐야 공정한 경쟁이 될 테지만 현재 스코어는 그렇다.
막상 우리가 만든 애플파이를 팔아 보라고 했으면 불가능했을 것 같은데. 간혹 세계 최약체 팀이 랭킹 1위를 이기는 이변도 있으니까 그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너무 맛있었지만 그만큼 힘들어서 또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마음을 고쳐먹고 딱 한 번 더 구워봤다. 예전 그 레시피를 못 찾아서 그런가, 영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사과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마르고 오래돼 처치 곤란인 사과를 처리하려고 파이를 만드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앞으로는 먹기에도 맛있는 사과만 파이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야 파이도 맛있다.
아니면 그날의 시간, 공기, 파이 성공 수치 등등이 절묘하게 결합된 결과물이었으면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