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사, 또 무슨 김치 보냈어?
‘도데체 이 하얀 스티로폴 박스는 며칠에 한번 오는 거야?’
남편이 박스를 내다 버리며 물었다.
포항에 사시는 박숙희여사와 통화를 하고나면 며칠 뒤면 어김없이 박스가 도착하고
그 안에는 여사의 의식의 흐름에 따른 다채로운 물건들이 담겨있었다.
대가리와 꼬리가 야무지게 제거된 가자미가 2마리씩 비닐봉지에 수북히 담겨있거나
내 손가락만한 쇠고기가 군데군데 존재감을 드러내는 미역국이 봉다리봉다리 얼려져 있거나
그지같이 옷 못입는 아줌마를 위해 큰 맘먹고 산 딱 박숙희여사 취향의 여성복이 놓여있거나
이종기 옹과 같이 드시다가 맛있어서 곁가지로 넣은 떡이 빼꼼히 보이기도 하고
6명의 손자 손녀 중 누군가 요청한 함니 장조림도 떡 하니 그 위용을 자랑하고
며칠 전 통화할때 스치듯 얘기했던 엄마의 액젓냄새 가득한 파김치와 정구지 김치가 겹겹히 쌓여서 인사를 한다.
내가 결혼 23년차이니 4년전 캐나다를 오기전까지 도데체 몇백개의 스티로폼이 그녀에게서 온걸까 ?
평생 주부로 사는게 성이 안차던 엄마는 딸 셋에게 늘 경제적 독립을 강조하셨다.
남편 월급으론 늘 빠듯하다며 지 손으로 벌어 먹고 사는 '멋진' 여자가 되라고 우리를 세뇌시키셨다.
그렇게 딸 셋은 엄마의 바램대로 일하는 신여성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워킹맘으로 사는 딸을 3명이나 둔 엄마는
세 딸년과 그 새끼들, 그 남편들까지 오늘 뭐 먹고 살았을까가 매우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김치 따위는 만들어 볼 시간이 없는 워킹맘인 딸 들을 위해 철철이 김치를 보내면서 곁가지로 반찬 몇가지를 더 채운 스티로폼박스에는 오늘도 새끼들 굶기지 말고 잘 먹이고 니도 잘 챙겨 먹으라는 엄마의 걱정과 당부가 항상 빼곡히 차있었다. 먹고 살기 바쁘다고 전화도 잘 하지 않는 나는 간신히 고맙다는 전화 한 통으로 이 정성스런 박스에 대한 값을 퉁치고 국물이나 냄새따윈 샐 틈없이 대단히 야무지게 여며진 비닐봉지를 뜯을 때마다 박숙희 여사는 손 힘도 좋아라고 고시랑 거렸다.
문 앞에 무심히 놓여진 흰 박스를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때가 되서야
내 손에 늘 떡하니 놓이던 각종 김치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굴과 새우젓이 여봐라 요란스럽게 맛을 내던 엄마의 김치대신
들어갈 것은 다 들어갔지만 어딘가 대단히 많이 모자란 색깔만 비슷한 배추버무리를 직접 담궈먹으면서
혀는 엄마의 김치를 만들어 내놓으라 한참 모자란 손에게 호통을 쳐댄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아프면 잘 읽은 김치 속을 툭툭 털어내고
멸치로 푹우린 다신 물에 콩나물과 식은 밥을 넣고 한쏘끔 끓여내서 해주시던 김치죽을 먹을 때도,
톡터지는 파김치에 쇠고기 한점을 돌돌 말아 먹어치우던 그 때에도
샛노란 조기 한 젓가락에 콤콤한 정구지 김치를 한 젓갈 올리고 찰밥과 서둘러 삼키던 그 순간에도
총각김치를 마침 먹기 좋게 잘라서 내 밥그릇에 올려주며 더 먹으라고 재촉받던 장면에도
요것만 먹고 살 빼라던 박여사가 있었음을...
밥과 반찬 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아들들의 입으로 나역시 부지런히 뭔가를 날라대면서
그 목소리와 눈빛들을 끄집어 내보곤 그 고된 수고스러움에 꾸벅 인사를 한다.
자고 일어나면 스티로폼 박스가 문 앞에 다시 놓여있으면 얼마나 신날까?
나박나박한 동치미를 부탁할까?
이 곳 까진 너무 멀겠지?
무리데쓰까? 박여사?
보고싶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