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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굽기 Jul 09. 2020

잃어버린 오후를 찾아서

식상한 저녁형 인간의 푸념

식상한 저녁형 인간이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서 팀플 발표를 전부 망치는 극적 요소도 없고 낮이라고 해서 병든 닭처럼 졸지도 않는다. 그냥 아침에 알람이 울리자 마자 깨어나서는 커피를 마시고 한껏 피곤해하다가 해가 좀 내려갈 때쯤 뭔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정도. 그 어떤 스토리도 만들어질 수 없는, 그냥 아침이라 좀 지친 사람 정도로 기억되기 딱 좋은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콜라도 가끔 버거울 만큼 카페인 내성이 낮지만, 낮에 높은 효율을 내기 위해서 커피를 자주 마신다. 전에는 커피가 없어도 깡으로 버틴다는 느낌이었는데 아침에 일을 계속 해버릇 하니 남들 생명수 생명수 하는 이야기를 따라서 하게 되어 버렸다. 요즘은 일이 많아 유독 더 피곤해서 커피 캡슐을 두 개씩 내려 마시는데, 이러다가는 언젠가 속이 쓰려 양배추즙을 마시면서 커피를 마신다는 사람들처럼 되어 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성향과 체력의 문제로 나의 최선은 언제나 오후 여섯 시쯤에 나왔다.


그래서 늦은 오후의 시간대는 나에게 정말 소중할 수밖에 없다. (이하의 모든 낭만적 가정은 내가 혼자 있다는 가정 하에 낭송될 것이다) 우선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대의 햇빛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선선해진다. 햇볕으로 살균되는 느낌. 진드기가 다 죽은 느낌. 구름이 조금 끼어 있다면 그것도 예쁘고. 카페인 없이도 정신이 살짝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약간 ‘오 그러면 차를 마시면서 뭔가를 해볼까’ 싶어지고, 왠지 그 시간이면 감성도 살짝 차오르고 음악이 괜히 감미롭고. 그러니까, 가장 즐겁게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하면 좋을까. 이 시간의 금색 햇빛이 보이면 나는 내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끼는데, 물론 내 삶엔 대체로 로맨스도 없고 내가 주인공감도 아니지만 그냥 시야에 필름 그레인이 잔뜩 끼어서는 내가 하는 말들이 노란색 이탤릭체 자막으로 나올 것 같다 대충 그런 말이다. 생각해 보면 그런 순간에 나는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 때나 나오는 행복이란 말이 요즘 정말 오글거린다고 생각하지만 그 때 그렇게 느낀 걸 어쩔 순 없다.



요즈음 느끼는 미끌거리는 삶의 질감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게 있다면, 요즈음 이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점이 그 주인공이 될 것이다. 어쩌면 생산성의 측면에서는 너무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마는. 근 일 년간 학원 일을 하고 있다.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근무 시간은 학생들의 하교 이후, 즉 늦은 오후가 될 수밖에 없다. 학원에는 바깥이 보이는 창문이 없고, 해가 저물기 전에 그 곳에 있다가 해가 저문 후에 바깥에 나온다. (물론 이 점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OECD 최고의 학생 고문 국가!) 그러면 우선 늦은 오후의 햇빛을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사실 빛도 빛이고 시간이 가장 문제다. 몸과 마음이 가장 살아있는 시간대를 일에 온전히 쓰고 있다. 생산성의 측면에서는 방금 말했듯 분명 최고의 능률을 가진 시간에 생산 활동을 하는 셈이니 가장 뛰어나겠지만, 하지만 이 시간에는 뭔가 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생산성 있는 인생 같은 걸 살 거였으면 인문 전공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강의라는 일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나는 가장 생생한 시간에 수업을 하면서 가장 생생한 모습을 보이며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건강상의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저녁을 가장 성대하게 먹는 이유가 무엇인가? 뒤에 아무 일정도 남겨놓지 않았기에, 하루 일과가 끝났다는 충만한 마음가짐과 그에서 오는 여유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퍼런스는 없다) 그래서 보통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약속은 저녁에 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저녁에 건강식을 먹으면 몸에는 정말 좋겠지만 왠지 서러운 기분이 든다. 일도 마찬가지이다. 능률이 가장 높은 시간대에 돈 나오는 일을 하는 건 정말 사회에 유익한 일이겠지만, 왠지 억울한 기분이 되어 버린다. 저녁에는, 책을 읽고 싶다. 아니면 글을 읽고 싶다. 멍하니 음악을 듣거나. 어느 겨울 오후 다섯 시에 스타벅스에서 느꼈던 아 행복하다, 를 다시 느끼고 싶다. 그 때는 통창으로 햇빛이 들어왔고, 책상 한쪽에는 읽던 책이 있었고, 앞에는 글을 쓰던 노트북이 있었고, 귀에는 이어폰이 있었다. 혼자였고. 그래서 종종 생각했다. 내게 늦은 오후가 있다면 삶은 훨씬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고.


덕분에 커피 마시는 데 조금 더 취미를 붙이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그러나 그 반례는 보기 좋게 내 삶에 상주하고 있다. 시험기간이 아니면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늦은 오후 시간대까지 일한다. (시험기간에는 마찬가지로 오후가 없다. 요즘이 그렇다고 볼 수 있는데, 맞다. 나는 지금 당근을 흔들고 있다)집에 가면 딱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가 된다. 그래서 내가 집에 가자 마자 바로 탐독을 하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토요일에 집에 오면 어영부영 축 늘어져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아주 늦은 시간이 되어 버린다. 요즘이야 자취를 안 하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니(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안락한 어감이지만 성격상 딱히 그런지는 또 모르겠다) ‘좋아하는 시간’의 조건이 완벽하지는 않다고 해도, 닷새동안 그렇게 열망하던 시간을 그렇게 맥없이 날려버린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한 번은 저녁시간에 엄마한테 푸념을 하듯 이야기를 했는데 아주 간결한 답이 돌아왔다. 저녁형 인간이 아침에 일을 하고서 버티겠냐?


전날 퇴근을 하고 집에 오면 오후 열 시쯤이 된다. 씻고, 저녁을 먹고, 다음날 수업을 준비하고 하면 금방 열두 시 한 시. 대여섯 시간쯤 자서 다음 날 여섯 시 사십 분쯤 일어나 씻고, 커피를 내려 마시고, 출근을 한다. 그리고 여덟시간 후 퇴근. 하기사, 주6일 일하는 입장에서 다섯 시간 자고 아침에 출근해서 일을 한 아침형 인간이 피곤한 몸이 아니라면 오히려 그 편이 더 이상하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음, 내가 꿈꾸던 완벽한 오후가 펼쳐질 날이 오긴 할까.



한참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날뛸 때, 내 다이어트를 실패로 이끌었던 건 다른 것보다도 억울함이었다.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짜증이 따라왔다. 내 삶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나까지 나를 괴롭혀야 하나? 억울함은 파괴력이 강했다. 잘 버티다가도, 그 생각이 들면 나는 당장 저녁으로 김치찌개를 먹으러 가곤 했다. 그 억울함을 얼마간 버티게 해준 건 아침밥이었다.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아침에 먹음으로 억울함을 풀었다. 충실하면 억울하지 않다.



종강을 해서 여유가 조금 생겼다. 다만 일하느라 날린 저녁이 억울해서 괜히 늦게 자고, 다음날 낮에 피곤해서 별 일을 하지 못하고 하는 식의 하루들이 반복되고 있다. 여유를 온전히 늘어지는 데에만 쓰고 있다. 물론 이게 정말 하고 싶긴 했지만 이런 걸 반기는 성격은 못 된다. 날려버린 낮 시간에 대한 억울함, 잃어버린 오후에 대한 억울함이 겹쳐 밤늦게 글을 쓰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결국 악순환의 반복이다. 굶은 낮이 억울해 야식을 먹는 셈. 학원 일을 하는 친구가 한 말이 문득 기억났다. 좀 바보같은데 자주 현자 같아지는 그 친구가 말하기를, 학원 강사의 가장 큰 장점은 평일 런치를 먹을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애슐리는 평일 런치가 최고지. 어차피 아침에 일을 해도 기진맥진해질 거라면, 당장 가지고 있는 낮 시간을 잘 써먹는 게 제일 나을 거다. 낮 시간에 글 쓰고 책 읽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자꾸 새벽 두 시에 타자를 칠 게 아니라. 충실하면 억울하지 않다.


다행히도 나는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낮이라고 졸지도 않고 늦잠에 미쳐 있지도 않다. 그냥 늦은 오후가 너무 좋을 뿐. 이른 아침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이른 오후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타협안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시간에 충실할 수 있다면, 언젠가 늦은 오후가 내게 찾아왔을 때, 더욱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낮을 충실히 써서, 아침에 일해도 지치지 않는 사람이 되면, 그때는 떠날 것이다. 잃어버린 오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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