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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 Aug 24. 2024

10. 아브라함,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찌질함

아브라함,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이스라엘의 시조, 믿음의 조상으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런 아브라함이기에 살펴보기에 앞서 기대함이 컸다.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까 싶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그것이 기대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깨달음이라 당황했고, 혼란스러웠고, 그래서 정리해 글로 토해내기에 버거웠다.


무엇을 기대했었고, 무엇이 기대와 달랐는지는 다음 질문으로 정리된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물론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그 이유는 분명히 아담과 하와가 또 다른 치명적인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악과와 더불어 금하신 열매, 영생하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그 외 선악과를 따먹은 대가로 일을 해야 하고, 출산에 고통이 따르는 벌을 받는 정도였고 여전히 직접 만드신 사람에 대한 기대는 이어졌다. 선악과의 일로 기대함이 없어졌다면 벗은 것을 알고 두려워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지어 입히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심판 전까지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신 것이 아닐까 싶다.

지켜보시는 중에 기대하심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후회하셨지만 역시 포기는 하지 않으셨고, 의인 노아를 선택해 새로운 시대를 계획하셨다.


노아는 의인이었다. 하나님이 온천하의 주인 되심을 알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썼다.

이것이 하나님이 노아를 선택한 이유였다.

노아는 그 기대와 선택에 부응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방주를 만들어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무시하고 질책하고 조롱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생각하면 미친 짓 아닌가? 산 위에 엄청난 크기의 배를 만든다는 것이 정상으로 보일리 없다.

이런 일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해낼 정도로 노아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즉, 노아는 선택될만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 노아를 시작으로 다시 인간사를 시작하면 인간들이 홍수 이전과 같은 죄악 된 모습이 아닌 노아와 같은 의로운 모습으로 살게 될 것으로 기대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바벨탑사건으로 그 기대도 무너졌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바벨탑 사건 이후 바로 셈의 족보를 소개하며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이유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까?'라는 질문은 노아와 대비되어 그 의문이 선명해진다.

'노아는 의인이라 선택했는데, 아브라함은 왜 선택한 것일까?'

'아브라함의 무엇이 다시 새로운 계획을 시작하시는데 필요하셨을까?'라는 것이다.


그럼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왜 이런 질문을 하게 됐을까?

생각보다 아브라함에게 뭔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실제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왜 아브라함일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의 모습은 평이했다. 일반적인 사람이 보일법한 선택과 행동들, 오히려 찌질함의 끝을 보여주는 듯한 행동들도 보여 정말 특별할 것 없는 보통사람 자체였다.


여기서 잠시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면면을 주요 사건을 통해 살펴보자.

시간의 흐름에 맞게 아브라함도 그 이름을 바뀌기 전 원래의 이름으로 표기하겠다.


먼저 가나안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라 하신 것이 아니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먼저 죽은 아들 하란의 아들인 롯만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다.

가나안으로 가는 중 하란(먼저 죽은 아들 하란의 이름과 지명의 이름이 같다.)이라는 곳에 머물다가 아버지 데라는 죽는다.


아버지 데라가 죽고 이때 하나님이 처음으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고 그를 부르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장 1절 ~ 3절)


갑자기 나타나셨고, 갑자기 떠나서 지시한 곳으로 가라 하셨고, 그 갑작스러운 명령을 아브람은 따른다.

솔직히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어디론가 가라 한다고 살던 곳을 정리해 바로 떠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그나마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은 이유는, 가라 하신 그곳이 아버지 데라가 자신들을 데리고 가려던 가나안이라는 점과, 누군지도 모르는 처음 만나는 존재이지만 압도적인 위압감에 못하겠다 할 수 없지 않았을까 싶고, 한 가지 더는 축복함이 매우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복 자체가 된다는데…

이것만 보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겠다 싶기도 하다.


이렇게 하나님과 첫 대면에 길을 떠난 아브람은 지시하신 땅 가나안에 도착한다.

이후로 아브람이 보인 모습은 정말 기대 이하이다.

특히나 아내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모습은 '찌질함'이라는 말 외는 표현할 말이 없다.


기근에 애굽으로 피해 내려갔을 때는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이 지나쳐 아내를 뺏으려 자신을 죽일 수도 있겠다 겁을 먹고 사래를 아내가 아닌 누이동생으로 소개한다.

누이동생이니 그냥 데려가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애굽왕이 사래를 데려가 범하려 했다.

이를 하나님이 도와 무사히 돌아오게 하셨지만 아내를 데려가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아브람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이뿐인가?

복은 주셨으나 후손이 없어 이것이 다 종들의 것이 될 것 아니냐며 주신 복이 무슨 소용이냐며 하나님 앞에 따지기도 한다.

뭐 하나님께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아브람의 속내를 알고 괴로워한 사람은 아내 사래였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인의 비참함이다.

사래는 후사가 없는 것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해 아브람에게 자신의 여종을 통해서라도 후사를 보라 제안한다.

이때 아브람의 반응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하나님이 주신다 하셨으니 믿음으로 기다려 봅시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이 안 주시더라도 당신만 있으면 괜찮소.'라고 말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더 있다.

결국 사래의 몸종 하갈은 아브람과 동침해 임신을 하고 이를 내세워 오히려 사래를 핍박한다.

이를 참다못한 사래는 아브람에게 억울함을 호소한다.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아브람은 사래의 억울한 호소가 있고 난 후에야 자기의 몸종이니 아라서 하라 할 뿐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래를 통해 낳은 자식으로 후손을 삼아 복을 주신다 단언하신다.

이때 축복을 약속하시며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로, 사래의 이름도 사라, 열국의 어미로 바꾸어 주신다.


하나님이 이 정도로 확증하셨으면 사라를 더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랄지방에 거류하게 될 때 아브라함은 과거 애굽에서의 실망스러운 행태를 또 반복한다.

그랄왕이 사라를 뺏기 위해 자신을 죽일 것을 염려해 사라를 누이로 소개하고 있다.


사라를 통해 그렇게도 원하던 후사를 주신다 약속하셨건만 사라를 보호할 아무런 의지가 없이 자신의 안전에만 집중한다.


물론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사라를 지켜 다시 돌려보내셨다. 심지어 놀란 그랄왕은 사라를 보낼 때 은 천 개를 주어 보내기까지 해 아브람의 소유가 크게 불어나게 하신다.


이쯤 할까 싶지만 더 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 이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괴롭힌다.

어느 엄마가 자식이 괴롭힘 당하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을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 이삭을 통해서만 축복을 이어가신다는 그 약속을 근거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낼 것을 아브라함에게 청한다.

이때 아브라함은 내켜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후에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 했을 때도 사라에게는 한마디도 안 하고 떠난 것도 그렇고, 사라가 죽자 바로 다른 여인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더 나은 것까지, 아브라함은 사라를 대하는 모습에서 매번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성심을 다해 잘한 것 딱 한 가지는 사라의 무덤을 위해서 제값을 치르고 제대로 구입한 것뿐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조카 롯과 관련한 일들에서 보인 아브라함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라는 점이다.


각자의 식솔끼리 다툼이 일어나자 이런 다툼이 빈번해지면 롯과 자신과의 사이도 멀어질 것일 염두했던 것 같다.

각자의 가족을 꾸릴 것을 제안하며 롯에게 먼저 원하는 곳을 정하라 선택을 양보하고 자신은 그곳이 어디라도 그 반대편으로 가겠다며 어른스럽게 처신한다.


롯이 이동한 곳, 소돔이 전쟁에 휘말리며 다 잡혀가고 재산도 빼앗겼다는 소식에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고 가병 300명을 데리고 출정해 끌려간 롯의 가족과 사람들을 구하고 빼앗긴 재물도 되찾아 돌려준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죄악으로 멸하신다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의인이 있을 수 있으니 멸하지 말아 줄 것을 간청한다.

의인 수 오십 명부터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십 명을 제안했고, 마지막에 열명이라도 있을 경우를 내세우며 집요하게 멸하지 않으시길 간청한다. 결국 아브라함의 간청 때문이었을까? 하나님은 롯의 집에 거하시고 피할 것을 지시해 롯과 그의 결혼하지 않은 두 딸이 살아남게 된다.

(롯의 결혼한 두 딸들은 말을 듣지 않고 남아 멸망당했고, 롯의 아내는 뒤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


롯에 대한 일들을 대응하는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를 대하는 아브라함이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부족사회에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족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해도 아내 사라를 대하는 아브라함은 납득하기 어렵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내라 그랬던 것일까 싶기도 하고, 그 시대에 여성의 지위가 그러했던 것일까 싶기도 하다.

모든 것을 납득한다 해도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순순히 보내는 행동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정리하고 나니 나도 어이가 없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왜 부르셨을까?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 민족을 이루시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하나님의 속내가 더 궁금해진다.



P.S

글을 쓰면서 성경을 직접 읽어야 하는 이유가 더 분명해집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의해서만 보연던 인물들, 사건들을 직접 살펴보면 다른 느낌과 다른 메시지를 접하게 되는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또 어떤 반전의 메시지가 있을지 다음글에서 나눠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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