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았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적 존재이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생은 이삭을 낳기 위한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악과의 사건으로 깨진 관계에서 인간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음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깨달으셨고,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드는 것의 시작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의 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을 시작으로 가정을, 민족을, 나라를, 마침내 온 세상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만드시기로 계획하신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에 시시각각 개입하셔서 순산순간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시키셨고, 온전한 신뢰의 관계로 만들기 위해 믿음의 훈련을 하시는데, 아브라함도 사라도 자신들의 생물학적 상태로는 도저히 자녀를 바랄 수 없는 상황까지 기다리게 하시고 그 바랄 수 없는 상황가운데서 이삭을 태어나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완벽히 신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증명되었다.
이렇게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스토리에 시작과 마침표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부모, 아브라함과 사라와는 다르게 이삭에 대해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창세기 25장 11절)
그리고는 뜬금없이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를 소개하고 바로 이삭의 족보를 소개하며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이삭의 이야기보다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로 넘어가 아버지 아브라함과 비교해도, 아들 에서와 야곱과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 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이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창세기 25장 21절 ~ 27절)
이렇게 임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이야기의 초점이 바로 태중의 에서와 야곱으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에서와 야곱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중에 스쳐가듯 언급되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 보다는 조금 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은 확실히 같은 문제를 처리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과는 다르다.
분명 자신이 부모에게서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더불어 아버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을 인정받던 그 순간, 이삭은 아버지의 믿음을 증명하는 제물로 함께 했고 하나님이 아버지의 믿음을 인정하는 음성과 자기 대신 마련해 놓으신 어린양을 목격하지 않았나!
이런 이유로 이삭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와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확실한 경험적 인식이 있었다.
이렇게 아버지 아브라함부터 겪어온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가 아들 이삭에게도 이어지며 이삭은 자연스럽게 자녀의 문제에서 만큼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즉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것에 기여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이 느리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의미적으로는 매우 크지만 성경은 야곱과 에서를 등장시키기 위한 빌드업 정도로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이후 바로 야곱이 사냥에 허기진 에서에게 팥죽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는 내용으로 이어지면 본격적으로 야곱의 이야기로 넘어가려 한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를 시작하다 잠깐 멈추고 그 다음장에서 오직 이삭에 대한 내용으로만 한 장을 할혜하고 있다.
마치 이삭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생각해 한 장을 끼워 넣은 것 같다.
이삭에 대해서는 아버지 아브라함과의 생활에서와, 아들 에서와 야곱과의 삶에서만 파악할 수 있을 뻔했는데 이 한 장이 그나마 이삭에 대한 면면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바람직했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이 한 장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마치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사하다. 그래서 또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싶기도 하다.
우선 처해진 환경적 상황이 유사하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기근으로 피신했던 것을 거론하며 그때와 같은 흉년이 들었다고 시기적 상황을 소개한다.
이때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시고 아버지처럼 애굽으로 가지 말고 지시한 땅에 거라 하여하신다.
그리고 축복이 동일하다.
아버지 아브라함에 에 하셨던 축복의 약속을 동일하게 하신다. '지시하신 땅에 거류하면 복을 주고, 이 지역의 모든 땅을 주며 아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고 그 자손들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이다.
그리고 하는 짓이 아브라함과 똑같다.
이어지는 내용에 이삭은 그랄에 거주했다고 기록한다.
그랄은 과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확약을 하신 후에도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소개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 했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삭도 아내 리브가를 누이로 소개한다.
사라도 아브라함의 이복동생으로 누이라 소개한 것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듯이, 리브가도 아버지 형제의 딸, 즉 사촌 여동생이니 누이라 하는 것이 거짓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를 누이라 소개한 의도는 누군가가 리브가의 미모를 탐내 데려가려 할 때 방해되는 남편을 죽이려 할 것을 대비함이다. 즉 데려가 동침하려 해도 허락하겠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고 이런 점에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사라를 통한 후손을 약속받고 이런 일을 행했던 것과 같이 이삭도 하나님께 별과 같은 후손의 축복을 약속받은 후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맥락 상 이때는 에서와 야곱도 이미 태어난 후로 보인다.
그랄로 이주해서 그곳 주민들에게 오누이관계라 소개했으면 부부라는 것을 티를 내지 말아야 하건만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는 것을 그랄왕 아비멜렉이 목격한다.
그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창세기 26장 7절 ~ 8절)
껴안았다 표현을 했지만 동침, 즉 성관계를 하다 보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 그랄왕 아비멜렉은 사라를 범하려 했던 그 아비멜렉으로 보인다. 사라를 범하려 했던 이후로 60년에서 8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라 200살 가까이 살았던 그 시대의 수명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인다.
이를 전제로 생각해 보면 그랄왕 아비멜렉은 이삭의 부모인 아브라함과 사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자신이 사라를 범하려 할 때 나타나 막으신 하나님을 떠올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상황파악일 것 같다. 아비멜렉은 이삭이 자신들을 속인 것을 나무라며 누구라도 이삭과 그의 아내를 범하면 죽일 것이라 명한다.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창세기 26장 10절 ~ 11절)
한 가지 더 아브라함과 동일한 것은 지역 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길 때의 이삭의 태도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축복하심으로 이삭은 농사의 소출과 가축의 번성함으로 거부가 된다. 이를 시기한 그랄 사람들은 현재 이삭이 사용하고 있는 우물, 과거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모두 막고 흙으로 메워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그랄왕 아비멜렉은 이삭이 강성하여 위협이 될 것을 염려해 떠나기를 요구한다.
이삭은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판다. 하지만 그랄 사람들은 그 우물이 자신들 것이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이때 이삭은 다투지 않고 다른 우물을 판다.
그리고 또 시비가 있었는지 옮겨 다른 우물을 판다. 그리고 아예 다른 지방으로 이주한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의 트러블이 있을 때 처신했던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렇게 다툼을 다툼으로 대응하지 않고 조율하고 피하여 처신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축복해 주셨다는 점도 동일한 부분이다.
여기까지가 이삭에 대한 대강의 기록이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개입해 가르치고 경험케 하시는 것으로 방법을 바꾸셨다.
이 새로운 방법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라고 볼 때, 그 시작인 아브라함과 비교해 아들 이삭을 보면 아주 조금 나아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신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구해 해결하려는 태도 정도다.)
시작부터 완전해질 수는 없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했던가? 태산이 높다 해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고도 했다.
인간이 불순종 함으로 갈라졌던 관계가 그러므로 망가졌던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고 경험케 하시고 알게 하시는 과정에서 천천히 회복되어 감을 본다.
추가로 아브라함만을 통해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이삭과 함께 살피며 느꼈던 것은 하나님은 다투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아브라함이 롯과의 트러블에서 양보함으로 대응했을 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세기 13장 14절 ~ 17절)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다툼을 키우지 않고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을 때 하나님은 동일하게 나타나셔서 이삭을 축복하신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6장 23절 ~ 24절)
어쩌면 그래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가 있었겠다 생각이 바뀐 부분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모두 다툼을 피해 손해를 감수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매우 중요한 소양이다. 손해보지 않으려 다투는 것은 기본이고, 다투어 빼앗으려 하는 일도 흔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며 그렇게 하나 됨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임을 생각할 때 다투지 않고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아마도 손해를 감수하면서 까지 다툼을 피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복을 약속하시는 이유도 그 중요성 때문이지 싶은 것이다.
'그거 중요한 거야, 잘하고 있고 계속 그렇게 해'라는 사인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떠나라 할 때는 언제고 그랄왕 아비멜렉은 찾아와 화친을 요청한다.
이삭의 번성함이 위협적이라 떠나라 했고 계속 남아있었더라면 물리적 충돌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 다툼을 피해 떠난 이삭이지만 아비멜렉은 자신과 같지 않은 이삭의 태도와 그럼에도 풍족함을 이루는 이삭이 매우 신경 쓰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배경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았다.
이삭은 잔치를 베풀어 화친의 요청에 답하고 끝없이 반목하고 싸우고 빼앗아 살아가는 인간사에 화평을 이룰 수도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끝없이 욕심을 따라 폭주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에 개입하셔서 다른 가치를 쫓아 살아도 원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음을 목격하게 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브라함은 매우 좋은 소양을 갖고 있었다. 부족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신뢰함이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삶에 매 순간 개입해 하나님에 대해서 경험케 하시는 것을 방법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경험치는 아들 이삭에게 축적되어 오늘 작지만 화평의 열매를 맺어 하나 됨의 가능성을 키웠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발 더 나가셨다.